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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죠의 삶 Jan 02. 2024

밝은 밤을 보내는 우리들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먹먹한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어느새 창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밤새워 읽었다. 읽고 싶은 책이라 도서관에 예약도서 신청을 했는데 본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친구와 요즘 읽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친구는 최은영 작가의 책을 추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새롭게 표현하니 정말 신기해!' '아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라고 다시 정리하며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최은영 작가님의 책이 너무 읽고 싶었다.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문장 하나가 이토록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하다. 


   밝은 밤, 이혼을 하고 엄마의 고향 희령으로 돌아온 지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혼의 상처로 고통받던 지연이 우연히 오래전 연락이 끊긴 외할머니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증조모 삼척, 삼척의 친구 새비아주머니, 그녀의 딸 희자 그리고 할머니 영옥이 주로 등장한다. 증조모 삼척의 인생은 마음이 저릿하게 기구하다. 삼척은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아픈 어머니를 두고 증조부와 함께 개성으로 떠난다. 그 이후 전쟁까지 겪으며 한평생 그저 살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한다. 삼척뿐만 아니라 밝은 밤 속 모든 삶은 애처롭다. 모진 세월은 그들로 하여금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식의 감정을 돌보기는커녕 자신의 감정조차 속이고 짓밟아 왔다. 그래야 또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무게는 지금과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지연의 고통도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미련과 상처는 비슷한 형태로 남아있다. 지연과 삼척이 닮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통해 어쩌면 가장 진한 인연으로 맺어진, 혹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며 한 번쯤은 지나가다 눈총을 보냈을, 그 누군가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책을 덮고 우리 엄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를 생각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어?" "독한 분이었지." 엄마가 말했다.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 할머니의 독함은 증조할머니를 닮았나 보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사 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한평생 여유를 부릴 줄 모른다. 좋은 것을 먹어도, 좋은 곳에 가도 늘 걱정이 앞서시는 분이다. 엄마는 늘 그런 할머니를 걱정하고, 나는 같은 이유로 엄마를 걱정한다. 엄마는 막냇동생이 10살 무렵부터 우리 삼 남매를 홀로 키웠다. 나는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지만, 가끔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언니와 나는 악몽을 꿀 때마다 비슷한 꿈을 꾼다. 그 꿈에서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나의 어릴 적, 엄마는 상냥하고 다정했지만 이따금 부정적인 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 당시 엄마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삼척에게 새비가 있듯 우리 엄마에게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돌보는 대신 자식들을 돌보는 것을 택했고, 스스로를 보살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나는 그걸 알기에 엄마의 속을 썩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내 상처는 가슴 깊이 묻었다. 그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며 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꽤 잘 컸다. 이제는 상처에 딱지가 앉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단단함을 키웠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엄마의 사랑 덕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지연과 지연의 엄마가 갈등했던 이유는 서로의 상처를 터놓고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 이후, 나는 엄마와 서서히 상처를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부디 엄마의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서 아직까지 새살이 돋아나지 않고 있다. 나는 엄마가 평생을 지고 있던 짐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난 어떻게라도 해서 엄마를 돕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불쌍해하지 않고, 아빠를 원망하지도 않으며, 마음 놓고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싶었다. 엄마와 나는 아직 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길고 긴 밤이 지나면 해는 뜨니까 그동안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의 빛이 되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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