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본업을 잊지 말자
얼마 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좋은 기회가 있었다. 친구의 친구 소개로 소소하게 시작한 모임은 점점 커져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취업 준비를 하며 단조로운 삶을 살던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설렜다. 대부분은 내 또래였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며 각자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이상 직업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배려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어색하게 끝나는 대화와 미묘한 분위기는 마음을 긁었다. 그분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날따라 서울에서 먼 곳에 사는 것도 속상했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긴 여정에서 나는 우스운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만약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부자였다면? 내 마음은 괜찮았을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헛웃음을 쳤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던 것도 떠올라 부끄러웠다. 사람들 틈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변호하듯,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마음을 잊고자 인스타그램을 켰다. 그러자 마케터 숭의 영감노트에 올라온 새 글이 보였다. "인생은 모두 부업일 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본업이다. 부업에 목숨 걸지 말고 본래의 할 일로 돌아오라. 재가 되기 전에" 그래, 내가 느낀 부끄러움은 남들에게 비치는 인생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본업은 따로 있다.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사랑하지 않으면 아프다'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굴레를 인지하고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타인의 시선을 좇다 보면 나 자신을 잃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특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사회 자체가 작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자유보단 속박을, 공존보단 경쟁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옆집 누가 어떤 차를 샀는지, 어떤 집으로 이사를 갔는지가 중요해진다.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끊임없이 과시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채우는 슬픈 사회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누구보다 개탄스럽지만, 그렇다고 마냥 도망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대로도 좋지'하며 나태해지자는 말도 아니다. 고여있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되, 그 방향을 잘 설정해야 한다. 타인의 소리보다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겠다. 어느 새부터 나의 시야를 헤치는 내가 아닌 껍데기들을 발견하고 알을 깨고 나오는 연습을 꾸준히 하자.
이런 생각을 마치고 나니, 그 모임은 부끄러운 기억이 아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처럼 나도 나의 방향으로, 나의 다음 단계를 찾아가야겠다. 삶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헤르만 헤세의 시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생의 계단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에서
모든 꽃들이 시들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그치는 일이 없으리라
자 그럼, 마음이여
건강하고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