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죽음에 대하여
‘70대 영화광의 쓸쓸한 엔딩’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각종 영화 포스터와 배우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 방 안에서 70대 노인이 고독사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는 영화로 둘러싸인 ‘제단’에서 쓸쓸하게 고독사 했다는 구절이 있다. 그의 마지막에 쓸쓸함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기사를 비판하는 댓글을 보았다. 어떤 이는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 쌓여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 거라고 했다. 나도 기사를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다.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고독사라고 부른다.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다. 우리는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너무나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지만 외롭고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사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어쩌면 나의 죽음의 스포일러라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마냥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는 점점 개인화되어가고, 주변을 둘러보면 결혼하고 아기를 낳는 삶을 꿈꾸는 친구들이 손에 꼽힌다. 섣불리 무엇 때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가 똘똘 뭉쳐 풀리지 않는 거대한 실타래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 거대한 실타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강렬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혼자 사는 삶을 생각해보곤 한다. 요즘 즐겨보는 넷플릭스 시리즈,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생각났다. 둘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는 친구가 된다. 세상의 마지막을 함께할 둘도 없는 존재. 나는 과연, 마지막을 함께해 줄 그 누군가 있을까? 우리 사회의 퍼진 개인주의 가치관은 걷잡을 수 없고, 사람들은 일방적인 양보나 타협에 인색해졌다. 나도 MZ라 불리는 세대의 일원으로서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불합리함을 못 견디는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결국 그 누구도 곁에 남길 수 없을 거 같아서 불안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의 안부와 관심을 공유하는 울타리가 작아져 예전처럼 마음껏 뛰어놀 수 없다. 심지어는 함께 안에 있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어느새 울타리 밖에서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목숨을 바칠만한 대단한 우정 따위가 아니다. 그저 인간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소수의 몇 명, 아니 단 한 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며칠 전 미운오리새끼라는 TV 프로그램에 고독사 방지 캠페인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요지는 노후 메이트를 만들라는 것. 주 시청 연령대가 중장년층인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고독사는 떠오르는 사회의 문제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서로 안부를 묻고 챙겨주는 한 명이 있다는 것, 쉬워 보이지만 얼마나 성공한 삶인가. 우리 모두의 삶에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