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는 음악이 흐른다. 물결처럼, 파도처럼. 음악은 흘러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제 나는 희망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철학자 칸트가 말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려는 것도 아니고, 기형도 시인이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말한 희망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지구곳곳에 전쟁과 분쟁,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희망의 불빛이 희미해 지고 있다. 희망은 공기와 같아서 한 순간이라도 부족하면 사람은 살 수 없다.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이 절박한 순간, 나는 한가로이 희망의 개념을 밝히거나 희망의 이유와 내용을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희망은 언어에 대한 희망이다. 언어에 대한 희망에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에 대한 가능성이다. 어떤 가능성일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그는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의 문제는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이해한데서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하고 세계와 언어의 관계에서 언어의 논리를 탐구하였다. 그리고 철학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언어의 한계를 제시했다. 즉,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으나 가치나 윤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치나 윤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20세기 철학과 과학에 영감을 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관점은 이제 유행을 지난 옷처럼 바뀌었지만 그 힘은 살아있다.
나의 희망은 그가 제시한 언어의 한계를 확대하는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관점을 뒤집는 것이다. 언어는 오히려 세계를 그리거나 표현하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국 드러난다. 우리가 언어로 말해야 할 것은 그가 말할 수 없다고 한 가치와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말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찾으려는 희망은 만약 우리가 가치와 윤리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절망의 계곡이 깊고 상실이 클 수록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말할 수록 희망은 커지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제 그 희망을 찾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