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여행자 Jun 21. 2024

GD 사인받는 승무원

  "OO씨, 이따 GD 사인받으러 가는 거 알아요?"

  "진짜요?? 지드래곤 님이 타셨다고요??"

  라떼 시절, 비행 중 신입 승무원에게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이 농담을 진짜 믿는 신입 승무원은 업무 공부 필요하다)



  매 비행마다 승무원은 GD 사인을 받는다.

  여기서 GD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수 지드래곤 g-dragon이 아닌 항공 용어 중 하나이다.

  GD는 General Declaration의 약자로 '항공기 입출항 신고서'를 말한다.

  이쯤에서 '뭐야? 갑자기 전문 용어. 재미없잖아?' 하고 이 글을 스킵하고 나가실 분들을 위해 알아두면 쓸모 있는 항공 상식을 준비했다. 거기에 재밌는 비행 에피소드는 덤.



  GD는 비행기가 출항 허가를 받기 위해 관계 기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이다. 승무원 명단, 승객 수, 여정에 대한 세부 정보, 화물 수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국제선 항공편에서 필요한 아주 중요한 서류이다.

  비행 시작 전 기장, 부기장, 사무장, 승무원 모두 GD에 쓰인 개인 정보를 반드시 확인해야 하고, 승객이 탑승을 완료한 시점에 GD를 비롯한 각종 입항 서류를 지상 직원에게 전달받는다. 전달받은 GD에 사무장은 서명을 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기장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 이때 승무원들은 "기장님에게 GD 사인을 받는다"라고 표현을 한다. 사인이 완료된 GD는 목적지에 도착 후 비행기 문을 열자마자 승무원이 지상 직원에게 전달한다. 이로써 승객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서류 내용을 바탕으로 목적지에 입국을 할 수 있게 된다.


  GD 관련해서 잊지 못할 비행 에피소드가 있다.

  괌으로 가는 여름휴가철 비행, 빈자리 하나 없을 정도로 비행기는 승객들로 가득 찼다. 승객 탑승부터 괌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승무원들은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쁜 비행이었다.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 쓰레기들을 갤리에서 한참 정리하고 있던 중 닫혀있던 갤리 커튼이 촥- 열린다. 사무장님이다.

  "ㅇㅇ씨, 혹시 갤리에 내가 GD 놨었는데 못 봤어요?"

  입항 서류는 보통 사무장이 관리하기 때문에 봤을 리가 만무하다.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갤리 선반에 올려놨었는데..."

  사무장님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갤리 밖으로 나간다. 사무장님이 GD의 행방을 물었지만 어딘가에 있겠지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GD 행방에 대해 잊힐 무렵 괌 도착을 알리는 기장님의 방송이 나온다.

  "Cabin crew prepare for landing."

  착륙까지 20분 남짓 남은 시간, 창밖으로 내리쬐는 햇볕에 반짝거리는 청록색 괌 바다가 보인다. 여행을 앞둔 승객들, 퇴근을 앞둔 승무원 모두 다른 의미로 설렌다.

  점프싯에 앉아 마지막 힘을 쥐어짜 은은한 미소를 띠어본다.

  그때 저 멀리 사무장님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걸어온다기보다는 뛰어온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비행 내내 아무리 바빠도 우아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던 그녀였는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없어!!... GD가 없어졌어!!!. 도대체 누가 건드린 거야?!!!!."

  괌에 도착하기 1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사무장님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그녀는 비행 내내 없어진 GD를 찾았지만 도착 전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진짜 없다고?... 진짜 큰일인데 이거...'

  그제야 나도 심각성을 느낀다.

  하필이면 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주노선 괌에서 GD를 잃어버리다니.. 승무원이 서류 하나 관리 못해서 혹여 승객이나 승무원들이 입국하는 데 지장을 준다면 어쩌면 뉴스에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또는 항공사 페널티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쓰레기통 다 까봐!!!. 트레시백 Trash Bag(기내에서 사용하는 쓰레기봉투)도 다 엎어보고!!!"

  사무장님의 목소리가 한껏 격양되었다.

  이건 진짜 긴급이다. 도착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우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소수 승무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승무원들은 쓰레기통 뒤지는 일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몇백 명의 승객들이 버리고 난 쓰레기를 뒤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엄청난 쓰레기양 때문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행기에서 나오는 쓰레기양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쓰레기통뿐만 아니라 식사 카트까지 다 뒤져보았다. 승객들이 먹다 남은 음식에서 알 수 없는 냄새가 뒤섞여 풍기고, 음식물이 줄줄 흐른다. 윽-거리며 망설일 시간이 없다. 유니폼 소매를 걷어붙이고 쓰레기통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억척스럽게 뒤진다. 끈적끈적한 콜라를 흘린 자국을 만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괌 시내가 보이기 시작하니 더욱 애가 탄다.

  그때였다. 옆에서 후배가 머리 위로 무언가를 들어 올리며 말한다.

  "찾았어요!!! GD!!!!!"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가 애타게 찾던 GD는 쓰레기봉투 속에서 나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사무장님이 기장님의 사인을 받은 GD를 쇼핑백에 넣어 갤리 선반에 두었다. 얼마 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온 기장님이 조종실에서 식사한 쓰레기를 버리려고 들고나왔고 마침 갤리에 쓰레기봉투처럼 보이는 쇼핑백이 있길래 그곳에 음식물을 버렸던 것이다. 그 후 후배는 쓰레기가 차있는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쇼핑백이 바로 GD가 담겨있던 쇼핑백이었던 것이다.

  "누구를 탓해... 갤리 선반에 놓고 간 내 잘못이지."


  괌에 도착해서 사무장님은 오믈렛 소스가 묻은 GD를 지상 직원에게 제출했다. 혹시나 깨끗하지 못한 서류를 제출했다며 반려되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괌 입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여기저기 음식물이 묻어있는 내 유니폼을 보니 해피하지 않다.

  GD가 승무원들에게 이렇게나 중요한 존재이다.



PS. 이날 비행 중 'GD 봤냐, GD 찾았냐'라는 말을 수십 번 하면서 돌아다녔는데요. 아마 승객들 중 승무원의 이야기를 엿들은 분이 있다면 오해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

언젠가 제 비행에 지드래곤 님이 탑승하셔서 '진짜 GD 사인'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작가의 이전글 비행기 화장실, 도대체 언제 사용할 수 있는 건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