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탱천하는 사회

바람처럼 느슨하게 살아보기

by 이말리
분기탱천(憤氣騰天).
요즘의 공기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누군가의 말, 표정, 말투 하나에도 우리는 쉽게 상처받고 화를 냅니다.
하지만 제주에선 조금 다릅니다.
바람을 맞으며 문득 깨닫습니다.
이토록 예민해진 우리, 그 속엔 외로움이 숨어 있지 않을까요?


제주에 살면, 아침에 창문을 열 때마다 바람 냄새가 다르고 길을 걷다 바다를 볼 때마다 잠깐씩 마음이 느슨해진다. 운전을 하다 중산간의 굽이진 들길을 가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스르륵 풀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는 이곳의 풍경은 늘 조금은 여유롭고, 카페나 식당에 앉아 있으면 모두가 조금은 천천히, 조금은 순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지하철이 있는 도시의 풍경은 다르다는 걸 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묘한 경직감이 느껴지고,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고, 입술이 굳어있는 모습들이 기억난다. 물론 제주도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다르다. 제주의 카페에서도 가끔,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 폰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을 본다. 점원의 말투가 조금만 차가워도, 옆 테이블의 대화가 조금만 시끄러워도, 우리는 금세 불쾌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제주의 여유로운 일상도 SNS 앞에서는 너무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누군가 올린 소박한 일상의 사진이나, 제주 여행기를 담은 글에도 늘 어김없이 엉뚱한 트집을 잡거나, 맥락과 상관없는 비난을 던지는 댓글이 붙는다. "거긴 원래 관광지라 바가지 씌워요." "제주도민들 불친절하던데요." "제주는 망해봐야 해요" "여기서 사는 척하지 마세요." 분명 그냥, 누군가 느낀 바람, 누군가 본 하늘, 누군가 마신 커피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구석에서 굳이 생채기를 내고 후집어 파내고야 만다.


요즘 스레드는 더욱 적나라하다. 댓글창은 분노의 전시장이 되었고, 누군가의 실수나 다른 의견은 곧바로 집단적 응징의 대상이 된다. 물고 헐뜯고 잡아끌어내리는 말들이 끝없이 생산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눈다. 남을 헤아리는 아량 같은 것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낯설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토록 예민하고 공격적인 존재가 되었을까? 우린 왜 이토록 작은 불편함도 참지 못하고, 조금의 기다림도 견디지 못하며, 다름을 인정하기보다는 틀렸다고 단정 짓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을 하게 되었을까?

분노가 요즘 시대의 지배적 감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전례 없이 많은 정보에 노출되면서도, 그 정보를 온전히 소화할 시간은 갖지 못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즉시 반응해야 하는 속도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여유 따위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분노의 뿌리는 무엇일까?

첫째는 불안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불평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예민해진다.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작은 변화도 위협으로 느껴진다. 둘째는 소외감이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연결된 시대에 우리는 더욱 외롭다. SNS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정한 소통은 줄어들었다. 피상적인 '좋아요'와 '댓글'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함이 있다. 셋째는 무력감이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바뀌지 않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바꿀 수 없는 큰 것 대신 가까운 작은 것에 화를 낸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맴돌 때, 마치 아비규환 같은 온라인전쟁터를 보다가 문득 창밖의 바람 소리를 듣거나 한라산 중산간의 숲에서 풍겨오는 짙은 나무 냄새를 맡으면 '아, 여긴 아직 숨 쉴만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깨닫는다. 분노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고, 변화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분노가 건설적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파괴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정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내 감정을 헤아려주고, 내 존재를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것.


소위 악성 댓글을 남긴 그들도 어쩌면 자기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 우리 모두가 느끼는 답답함과 서운함,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이해받고 싶은 갈망을, 그들도 어딘가에선 조용히 품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분노 뒤에도, 어쩌면 누군가의 외로움이나 두려움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정작 다른 사람에게 그런 배려를 해주고 있을까?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아량을 보이고 있는가말이다. 나 부터도..


그렇다면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먼저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즉시 반응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대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찾아보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다음은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안의 분노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그 화 뒤에 숨은 진짜 감정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이다.


분노가 올라올 때, 잠깐만 화면을 닫고 제주의 바람을 느껴본다. 내 안의 온기가 식지 않게,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오늘은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따뜻하게 나를 지켜보기로 한다.


결국 우리 모두가 찾는 것은 같다.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이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 내 감정을 헤아려주는 사람, 내가 실수했을 때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사람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내 안의 분노 뒤에 숨은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분노의 시대라고 해서 우리 모두가 분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서로의 불안을 달래주고, 서로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분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이해와 공감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온 세상이 화로 가득 차 있음에도, 바람이 스미는 만큼은 서로의 마음에 틈을 남겨두고 싶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원합니다.
내 말을 들어주고, 내 감정을 헤아려주는 사람.
실수했을 때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사람.
흔들리되 부드럽게, 상처받되 단단하게.
화가 날 때마다 한 번쯤 멈춰서,
내 안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유.
분노는 그저 하나의 신호일뿐입니다.
“나, 지금도 인정받고 있고, 이해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나?”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더 쉽게 날을 세웁니다.
혹시 오늘 당신도 이 분노의 사회에서 숨 고르기 중이라면,
잠깐만 창문을 열어보세요.
바람처럼, 조금은 느슨하게.
당신은 오늘, 어떤 바람이 되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