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연과 손절하며
그러니까 3년 전쯤인가. 제주도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성별은 여자였고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주변에 오빠라는 사람들이 연령대가 높아 덩달아 그 영향을 받았는지 내가 즐겨 듣는 80-90 음악에 대해서도 해박했고 중요한 건 그 나이 때에 맞지 않게 대화가 잘 통했다.
나의 직업은 요리사였고(지금도 그렇지만) 작은 주방을 빌려 그 친구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할 만큼 중요한 존재로 각인되는 사람이었다.
제주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육지로 올라와 간간히 안부 정도 묻는 관계에서 그다음 해 제주도에서 잠깐 만나 담소를 나눴고 그다음부터 연락은 뜸해졌지만 인스타 정도로 뭘 하고 사는지는 확인하곤 했다.
주로 사진을 했고 이것저것 부업으로 (본인 말로는 멀티 잡)을 하는 걸 알고 제주투어를 간혹 하는 걸 알았기에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지인이 제주도에 가면 투어를 부탁할 겸 꽤 오랜만에 연락을 했더니 “투어는 원래 나의 친구들을 위해서만 하는 거예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사진만 하는 거니?” 라고 물으니
“스냅사진도 원래 친구들을 위해서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여 “원래는 원래 그런 거예요.”라는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혹시나 나의 부탁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강한 악센트로 느껴졌고 “응 이해했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인스타에 가끔 모임을 할 때 올라오는 글귀인 ‘예스 키즈, 노 실버’ 라던지 ‘남자를 찍으면 카메라가 깨진다’라는 페미니즘에 많은 영향을 받은 해쉬태그 문구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다가 갑자기 그 문장들이 어느 순간 거대한 벽처럼 다가왔다.
이미 끊어져버린 팔로우를 정리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념이라던지 신념이라던지 가치관 이라던지.
그 모든 걸 존중한다는 배려의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를 내뱉으며 가지게 되는 그 마음들이 갑자기 공허해졌다.
오랜 시간 친구라는 단단한 유대감이 아닌 짧다면 짧은 우리의 인연이 그렇게 정리되면서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단절 앞에서 그런 것들이 대체 무엇이 소용 있을까?
(생각해보니 지금 쓰는 닉네임도 그 친구가 붙여줬네. 곧 바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