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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수 Sep 20. 2023

진실 탐구자와 거간꾼 사이

여론조사가 넘쳐나는 시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알기가 어렵다 보니, 사람 이 더 궁금 해지는 모양이다. 여론조사 기사는 포털사이트터줏대감으로 눌러앉은 지 오래다. 하지만, 늘 알쏭달쏭한 부분이 있다. 같은 주제, 비슷한 시점의 조사인데도 여론조사 결과는 고무줄처럼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분명 진실의 값은 있을 텐데, 다들 맞다고 우기는 것 같아 보는 이만 답답하다. 조사값들은 진실, 착오, 왜곡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 속 어디쯤에 위치하겠지만, 알 길이 없다.


진실의 값에 접근하려면 전체를 확인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실행이 어렵다. 돈도 많이 들고, 시간의 문제도 맞물린다.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경우도 수두룩하다. 이러한 장벽에 가로막히는 것은 비단 여론조사뿐 아니라, 다른 조사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참치공장에서 통조림에 이물질이 들어있는 불량률 확인이 필요하다고 해보자. 전체를 조사하려면 모든 통조림의 뚜껑을 따봐야 한다. 불량품이 몇 개인지 정확한 확인은 가능하겠지만, 조사과정에서 뚜껑을 딴 참치캔 전부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수조사의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표본조사가 선호된다. 부분으로 전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재해로 인한 농작물 피해 조사도 대체적으로 표본조사로 설계된다. 태풍 피해로 신음하는 널찍한 논을 조사하기 위해, 한두 평을 표본으로 삼아 전체 피해를 추산하는 식이다. 보다 정확히 알려면 벼를 모두 베어내고 탈곡한 후 무게까지 달아봐야겠지만, 시간이나 비용측면에서 무리수이다. 농작물 손해평가의 기본골격이 표본조사이다 보니, 여론조사와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같은 논을 비슷한 시기조사하는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피해율이 들쭉날쭉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느 정도야 눈감아 준다지만, 편차가 너무 커지면 문제다.


손해평가사를 현장에 투입할 때는 흔히 2명으로 평가반을 구성한다. 숙련된 평가사와 신참 평가사로 짝을 맞춘다. 신속한 일처리와 신참에 대한 경험 전수, 양수겸장을 노린 포석이다. 이렇게 조화를 이룬 평가반이 막상 현장에 나가면, 의견충돌로 마음을 상하는 경우가 꽤 있다. 원칙과 융통성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신참은 갓 배운 이론과 원칙을 꼿꼿이 지키려 하고, 선배 평가사는 빠르고 둥글둥글한 일처리에 무게중심을 둔다. 신참은 조사를 띄엄띄엄한다며 구시렁대고, 선배는 현장 상황은 무시한 채 원칙만 앞세우는 신참에게 눈을 부라린다.


원칙과 융통성의 조화, 어려운 과제다. 원칙만 곧이곧대로 따르다 보면 조사 지연으로 기한 내에 조사를 마치기 어렵다. 또, 원칙이 정해지지 않았거나 적용할 수 없는 길에 접어들면, 감전된 듯 어쩔 줄 몰라한다. 반면, 과도한 융통성은 정확한 조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융통성이 과해지면 나태로 흐르기 쉽다. 심한 경우 자신이 마치 신내림 받은 무당인양 신통력으로 조사결과를 척척 뽑아내는 지경까지 악화되기도 한다. 원칙과 융통성 사이의 균형감은 진실의 값을 탐구하는 손평가사의 핵심 덕목이다.


손해평가사의 진실 탐구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변수이해관계자들이다. 손해평가 과정에는 농작물 피해를 입은 농부,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지역농협, 이익이 존립기반인 손해보험사의 이해가 얽히고설켜있다. 대체적으로 농부와 지역농협은 피해율을 높여 충분한 보상을 받기를 원하고, 손해보험사는 과도한 보험금 지급을 막기 위해 피해율이 제대로 측정되는지 의심의 눈길로 지켜본다. 이해관계자의 관심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영하느냐에 따라, 같은 농작물 조사라도 손해율이 요동친다. 농부의 볼멘소리를 애처롭게 듣다 보면 피해율이 높아지고, 검증을 통해 엉터리 손해평가사를 퇴출하겠다는 손해보험사의 엄포에 위축되면 손해율은 빡빡해진다.


이런 사정으로 손해평가사는, 진실의 탐구자인지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거래를 흥정하는 거간꾼인지, 미로 속을 헤맨다. 분명 손해평가사는 표본을 잘 추출해서 제대로 조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손해평가사의 임무는 정확한 손해율 평가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이 불티가 되어 악성 민원으로 불이 옮아 붙으면, 대개의 경우 불에 데는 쪽은 손해평가사다. 십중팔구 모두가 시치미를 떼고 손해평가사를 흘겨보기 때문이. 이해관계자들의 눈총 속에 외줄을 타야 하는 손해평가사의 마음속 풍경엔, 안개가 자욱하다.


나는 바란다.

손해평가사들이 항상 원칙과 융통성의 균형감을 잃지 않기를,

땀 흘려 조사한 결과를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이해관계자들 간의 불협화음으로 발생한 민원이 더 이상 선량한 손해평가사를 괴롭히지 않기를,

거간꾼이 아닌, 진실 탐구자로서의 길을 계속 정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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