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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고싶은JH Jan 02. 2024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준 엄마에게

_이제는 내가 뜨겁게 지지하기로 하다.


국민학생 때의 일이다. 

공개수업이 있는 날 아침이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는 엄마를 참 좋아했지만 다소 뚱뚱한 엄마가 부끄럽기도 했다. 아이들이 분명 "누구누구 엄마다!" 할 텐데... 

공개수업 날의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수업 중 흘끔 흘끔 뒤를 확인했다. 엄마가 오셨다. 하얀 바지에 흰 무늬가 있는 네이비 블라우스를 입은 배가 뚱뚱한 엄마가.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활짝 웃어주셨지만 보았을 것이다. 내 얼굴에 비친 반가움과 반가움을 뚫고 나가는 부끄러움을, 읽으셨을 거다. 

엄마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엔 서둘러 교실을 나가셨고, 나는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못난 내 모습 사이에서 울적했었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도 그러했다. 

엄마는 박봉인 공무원의 외벌이 살림에 4남매를 키우시면서도 우리 앞으로 대학 자금, 각종 보험을 모두 들고 계셨다. 미래를 대비하는 딱 그만큼 우리 집 살림살이는 더 팍팍했졌을 것이다. 엄마는 신문배달을 시작하셨다.

통이 넓은 네이비 5부 바지, 목이 늘어나 헐렁한 반팔 셔츠, 햇빛을 막아줄 창이 넓은 모자, 목에는 땀을 닦을 수건, 그리고 굵어진 종아리, 바쁜 발걸음. 아직도 선명한 엄마의 모습을 쓰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런 엄마를 중학생인 내가 부끄러워했다.

엄마의 배달지는 내가 다니던 중학교 언저리를 포함했다. 정문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간혹 엄마를 마주치고 곧장 직직하면 피할 수 있었다. 특정 요일에 하교 시간과 엄마의 배달시간이 겹친다. 내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교하는 날이다.

'앗, 엄마다.'

나는 분명 저 멀리 신문을 배달하는 엄마를 보았지만 못 본 척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곧장 골목 아래로 내려갔다. '분명 엄마도 날 보셨던 것 같은데...' 마음이 무거워지자 재잘대는 친구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집에서 만난 엄마는 내게 한 마디도 않으시고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다시 못난 내가 부끄러웠다. 많은 것에 완벽하고자 했고 꿀림이 없고 싶던 그때의 나에게, 나의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은 엄마와 나 자신에게 상처 주면서까지 감추고 싶은 무엇이었나 보다.


고등학생 때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방황이 구체화되던 시기였다. 

그래봤자 집에는 전혀 티 나지 않게 내면의 지옥을 혼자 견디는 수준이었다. 고 3이던 한날은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학교 가기가 싫었다.

 "엄마, 하루만 놀고 싶은데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 좀 해주면 안 되나?"  

학창 시절 내내 성실하고 열심이던 내가 무려 학교를 결석하겠다는 말에 엄마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기 싫나?" 한 마디 하시고는 전화를 해주셨고 더는 묻지 않으셨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엄마를 걱정시키는 이런 일은 두 번은 안 해야지 다짐했다. 


" 진화는 서울대 가야지~ "

어릴 때부터 공부를 곧잘 해왔고, 외고도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했던 내게 부모님과 친척들은 크게 기대했다. 특히 친가 친척들에게 나는 이미 서울대생이었다. 그런 말에 우리 아빠는 '허,허,허' 하는 특유의 웃음으로 기뻐하셨고, 엄마도 내심 좋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외고에 진학해서 방황하기 시작한 나는 좀처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고, 이미 선행학습을 마친 매사 여유 있는 집안 아이들을 보는 것도 주눅이 들었다. 아슬아슬 유지되던 성적은 2학년 하반기부터 눈에 띄게 떨어졌고, 막판 따라잡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다른 과목은 거의 만점까지 끌어올렸지만 수학이 처참한 수준이었다. 서울대는커녕 부산대도 커트라인 낮은 학과로 가서 전과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더는 이런 수험생활을 하고 싶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과를 에둘러 가기 싫었던 나는 가고 싶은 과가 있고, 친척분이 계시는 지방의 국립대로 진학했다. 내가 이미 서울대생인 친가 친척들에게 굉장히 놀라운 결과고, 부모님의 입장이 난처할 거란 걸 예상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방 국립대의 가고 싶은 학과로 지원했다. 


부모님 눈치가 안 보일 수 없었는데, 두 분은 신기할 만큼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는 다소 실망하신 듯했지만 티 내지는 않으셨다. 충분히 이해했다. 

엄마는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결정하라 하셨고, 고민 끝에 지방 국립대로 간다고 했을 때 활짝 웃으면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다. 이제 고생 끝났으니 대학 생활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라고 토닥토닥해주셨다. '뭐지... 진짠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 표정과 말투는 진짜였다.

 '부모님의 기대, 친척들의 수군거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 ' 


그때 엄마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진심이지만, 존재하는 다른 마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하게 나를 지키고 전적으로 지지해 준 엄마에게, 또 아빠에게 지금도 고맙다.  그때 그 경험이 내가 나로서 당당하게 살게 하는 시작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삶의 특별한 장면마다 묵묵히 믿고 기다려주는 것으로 나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준 엄마.

숨고 싶은 입시 결과 앞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애쓰던 나를 당당하게 고개 들게 한 엄마.


그런 엄마가 고개를 숙였다. 길에서.

마비된 몸, 다소 일그러진 눈과 입,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몇 번을 더듬는 엄마.

그런 엄마가 이젠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었는데, 

휠체어에 앉은 엄마는 인생에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을 모습으로 다시 마주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고개 숙인 엄마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재활운동, 언어치료만큼이나 중요한 일!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휠체어에 앉아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  그렇게 삶에 대한 호기심을 이어가는 일. 


주말마다 병원을 벗어나 서울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휠체어로 가는 서울은 서울살이를 동경해 자주 상경했던 내게도 생경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외출은 장애를 수긍한 체 이 세계에 적응하고 다시 삶을 긍정하는 과정인 동시에, 조금 다른 환경적 요구를 가진 존재가 여기 당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더욱 멈출 수 없는 이 외출을 언제까지고 지속함으로써 엄마의 여생에 뜨거운 지지를 보내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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