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엄마가 쓰러지다.
밥 먹다 말고 울컥했다.
무심코 바라본 엄마 혈압일지가 2015년 2월 8일 아침에 머물러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 매일 아침 식탁에 앉아 숨을 고르고 혈압을 측정한 뒤, 펜을 꼭꼭 눌러 결과를 기록하던 엄마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2015년 2월 8일 아침 7시 40분.
수축기 혈압 135, 이완기 혈압 95, 맥박 66의 엄마는 내가 골라드린 코트를 입고 내가 사드린 모자를 쓰고 대구 결혼식에 가셨다.
왜였을까?
문득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엄마는 예쁘다는 말에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해 주셨다. 그것이 자유로운 몸으로 찍은 엄마의 마지막 사진이었고, 그 사진 이후 엄마와 나, 우리 가족의 삶은 되돌아올 수 없는 어떤 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 누나야, 엄마가 식장에서 쓰러지셨다 하거든?"
"으응?... 왜? "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 지금 대구에서 백병원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니까 입원 준비해서 오래. "
"백병원?"
"응, 개금 백병원."
"그래.. 알았어."
부산역에서 친구들과 계모임을 하고 있던 나는 빕스에서 식사를 끝내고 투썸플레이스로 자리를 옮겨 달콤한 아포가토를 먹는 중이었다.
'뭔 일이지...'
동생의 전화를 받고 살짝 멍해졌지만, 그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이다.
얼마 전 스터디 모임을 함께하던 오빠의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가 '별문제 없었다.'라며 하루 만에 퇴원을 하셨던 일이 떠올렸다.
' 괜찮겠지. '
그래서 조금 더 카페에 앉아 있다가 집에 가서 짐을 챙겨 백병원으로 향했다.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나.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구급차가 도착한 직후에나 도착했다.
" 빨리 안 오노 뭐 했노." 이모의 타박을 들으며 응급실로 들어섰다.
'이게 다 뭐지..??'
엄마는 한 가닥 한 가닥 천천히 정리하며 세어봐야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링거줄을 달고 계셨다.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고통을 견디는 것인지 무엇을 하는 건지 모를 몸짓을 반복하셨다. 계속해서 옅은 신음 소리를 냈었던 걸로 기억한다. 소변줄을 꽂고 계셨는데, 다리도 힘을 잃고 이리저리 휘적이는 중이었다. 충격적인 장면에 입이 벌어졌다. 내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던 아침의 그 엄마가 아니었다.
솜털이 바짝 일어설 정도로 나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바로 엄마의 눈동자였다. 엄마의 동공이 상한 달걀을 바닥에 깨뜨려놓은 듯, 힘없이 제멋대로 유영하고 있었다. '쿵!'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을 때 사용하는 그 흔한 의성어가 순간 온몸으로 울려왔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흔하지 않은 사건임이 분명했다.
엄마를 대구에서 부산까지 모셔 온 응급구조사에게 엄마의 가방을 넘겨받았다.
검은 프라다 가방 속에는 아침에 매 드렸던 스카프, 지갑, 수첩, 엄마의 모자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사치품, 백화점 물건이라고는 모르고 사셨던 엄마에게 나는 취직 후에 종종 선물을 해드렸다. 엄마 스스로는 결코 지갑을 열 생각조차 못 할, 그러나 직장인들에게는 어마하게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보통의 물건들을 말이다. 처음엔 사지 말라고, 필요도 없는데 이런 걸 왜 사냐고 하시다가 한 번 두 번 반복되자 기쁘게 고맙게 받아주셨다. 그게 좋았다. 딸이 사드리는 맛있는 음식, 좋고 예쁜 물건들을 자연스럽게 받는 그런 무드가 좋았다.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럴 만큼 키우셨으니까.
프라다 가방은 스페인을 여행할 당시 내 것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샀었다. 내 것은 가죽, 엄마 것은 들기 가벼운 패브릭으로. 등 뒤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앞으로는 보조가방, 손에는 프라다 가방 두 상자를 들고. 남은 일정을 조금 힘들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 가방을 받고 엄마는 되게 좋아하셨고, '프라다'라는 세 글자를 많이 생소해하셨다. "프. 라. 다. 프라다."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려면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몇 번을 알려드리고 따라 말하며 한참을 깔깔거렸던 그 가방이다.
모자는 어떤가. 보통 엄마 모자를 할인 매대에서만 사는데, 언젠가 처음으로 엄마를 매장에 모시고 가서 정가를 주고 사드렸었다. 좋은 날에만 가끔 쓸 정도로 소중하게 다루던 모자였다. 그 귀한 모자가 한껏 찌부러진 채 아무렇게나 욱여 넣어져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엄마의 절체절명의 시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뇌출혈. 엄마의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뇌졸중에는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혈관이 파열되는 뇌출혈이 있는데, 엄마는 뇌의 아주 깊숙한 부위인 기저핵과 시상에 17cc의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양의 출혈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구 동산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더 이상의 출혈은 없기에 당시 동행했던 친척들, 아버지의 상의하에 구급차를 태워 부산으로 모셔온 거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뇌 CT 사진들이 의사의 설명과 함께 내 앞에 펼쳐졌지만, 놀란 내가 알아먹기에 의사들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고, 나 또한 이 병을 잘 몰랐다. 뇌에 출혈이 생기면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는지, 예후가 어떤지, 환자를 비롯한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병실이 나지 않아 응급실에서 이틀 정도 대기했다.
응급실은 환자가 안정을 취하거나 안정적인 의료 서비스가 공급될 만한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백병원의 응급실 침상은 유독 좁았다.
당시 아빠는 퇴직한 공무원, 동생과 언니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라 내가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전화를 돌렸고 사람들은 지인을 통해 연락을 넣어 주었다. 너무나 감사했지만, '네, 신경 써드릴게요."에서 끝이었다.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없었다. 친구 남편의 지인이었던 원무과 직원은 내가 두 번째 찾아가 병실이 언제쯤 날 것 같냐고, 잘 좀 부탁드린다고 하자 버럭 성질을 냈다. 아마도 이런 부탁을 많이 받으니 본인도 스트레스를 받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도 한껏 죄송해하며 어렵게 말을 꺼낸 건데, 가만둬도 힘든 환자 보호자한테 굳이 성질까지 낼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바짝 수그려 죄송하다 말한 뒤, 한 번 더 부탁을 하고 나왔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했는데도 좁은 응급실 침대를 이틀째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서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특별히 가진 것은 없어도 탄탄한 직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보통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나도 기댈 곳이 없는 이런 느낌인데, 나보다 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서러울까 싶었다.
응급실로 돌아와 여전히 의식 없는 채로 몸을 뒤척이는 엄마의 링거줄을 정리했다.
여전히 온기가 있음에 감사한 엄마의 팔다리를 닦고 주무르면서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리고 3일째, 병실을 배정받았다.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이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뇌졸중 재활환자의 보호자로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