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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고싶은JH Dec 16. 2023

휴직, 엄마 옆에 있기를 결심하다.

_ 담대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걸어야지. 이제는 인지는 포기해야 돼. 무조건 걸어야 돼요. 시간 완-전히 헛보냈구만."

무뚝뚝한 표정의 주치의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호통치듯 말했다.


재활 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를 직접 모시고 가려 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마침 통합반 적응 기간으로 오전 수업이 없던 내가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간 길이었다. 


'인지는 포기해야 돼.',  '인지는 포기해야 돼.'

'시간 완전히 헛보냈구만', '시간 완전히 헛보냈구만'


귓가를 때리듯 맴도는 의사의 말에 휘청하며 겨우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왔다.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며 눈물이 확 쏟아졌다. 간호사가 위로해 주었지만, 등을 두드려주는 그 따뜻함만 남았을 뿐 어떤 말로 위로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아직 본인 이름도, 가족들 이름도 잘 모르시는데 인지는 포기하라니.

하루에도 몇 번을 알려줘도 이름을 물을 때면 고개를 연신 갸우뚱하며 답답해하는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병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내 시야 밖에서 뭉개져 보이지 않았다. 누가 듣든 말든, 보든 말든 어깨를 들썩이며 아이처럼 울며 걸었다. 꺽꺽대고 울며 하는 내 말을 원무과 직원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 약을 받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눈물을 멈추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교실로 돌아와 앉으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결정을 해야 했다.


백병원에서 재활병원으로 전원한 후, 낮 시간에는 재활병원의 스케줄에 맞춰 재활운동을 하고 아버지가 그 곁을 지키셨다. 저녁 시간은 주로 내가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연로하시고 낮 시간 내내 병원에 계시니 휴식해야 했다. 본가로 돌아간 작은 언니와 체격이 커서 보호자 침대가 많이 불편할 동생은 제외했다. 게다가 동생은 막 취직을 한 터라 자리 잡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체력 좋은 내가 좀 더 많이 담당하고, 큰언니가 교대를 해주었다. 


퇴근하면 잠시 집에 들러 출근 준비 후, 다시 병원으로 가서 엄마를 돌보았다. 엄마의 기본적인 위생관리, 병원생활 지원만이 아니라 인지를 자극할 수 있게 여러 교구를 활용했고, 옛날 사진을 놓고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엄마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살피기도 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자고 출근하길 한 달 반쯤. 우리 가족은 이 상황에 열심히 몰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게 확실해졌다.


사실 이미 대안을 놓고 고민하던 차였다. 

체격이 있는 엄마는 몸이 마비되자 그 무게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일으켜 세우고, 다리 한 번 들어 올리는 것도 기를 모아야 했다. 나는 이후에 손가락에 관절염이 와서 엄마가 치료받는 동안 같은 층에서 파라핀 치료를 받으며 지냈다. 그 정도로 마비된 몸은 무겁고 힘들었다. 대소변 실수도 잦았다. 부지불식간에 떨어지는 대소변을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엄마가 속상해하지 않게 처리해야 했다. 이런 급성기에는 아빠가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평일 낮 병원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남자 보호자의 영향도 컸다. 

점심을 먹고 부모님과 나는 병원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어머니를 간병하는 그 보호자는 다음 치료를 기다리며 매트 위에서 자가운동을 실시하고 있었다. 


'아, 저기서 차이가 만들어지겠구나! 스케줄 없을 때 병실에 누워 쉬고 낮잠 자고 토막 짜기, 퍼즐 맞추기만 해서 될 게 아니구나.' 


이미 최대치를 해내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 중 누군가가 붙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게 큰언니였으면 했다. 

치료가 길어지면 돈도 많이 필요해질 것 같아서 벌이가 많은 쪽이 일을 지속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언니보다 벌이가 좀 더 나으니 내 월급에서 언니가 현재 받고 있는 월급을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퇴근시간이 빠르니 평일 교대도 빨리해줄 수 있고, 몇 달 뒤면 방학이니 그땐 내가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4대 보험이 있는 직장에서 한창 재미를 느끼며 일하고 있던 언니에게 벌이가 적다는 이유로, 언제 또 그만둘지 모르는 평생직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퇴사를 권유할 수는 없었다.  나에겐 휴직이 있지만, 언니에겐 퇴사였다.  물론 나도 노력을 다해 이룬 것이지만, 이루고 싶은 것은 이루고, 하고 싶은 것은 하며 살았다. 그러나 언니의 삶은 자타의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은 삶이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면이 못내 마음 쓰이던 차라 더욱 그럴 수 없었다. 더군다나 누군가 엄마 옆에 있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언니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 완전히 헛보냈구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엄마에겐 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일 테다. 지금을 놓치면, 엄마가 충분히 회복하지 못하면, 엄마를 포함한 가족 전체의 삶이 더 오래, 더 많이 힘들어질 것이 그려졌다. 


" 교장 선생님, 저 휴직하겠습니다. "

 그날 오후,  학교에 간병휴직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휴직하는 걸 굉장히 안타까워하시면서도, 엄마 옆에 있어드리라고 그게 잘한 결정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마지막 출근길,  운동을 힘들어하면서도 부쩍 반찬을 가려 드시는 엄마 때문에 왕창 지각 출근을 하면서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휴직에 대한 결심은 매우 빠르고 확고했지만, 담담하고 담대한 마음 가운데서도 그러했다. 


애살을 가지고 다니던 화실, 영어회화 스터디, 놀이연구모임, 세계 일주 사진 모임, 내가 좋아하던 공연, 그해 계획했던 싱가포르, 상해, 코카서스 3국 여행 등... 엄마가 쓰러진 후 내 모든 계획을 일순간 내려놓고도 의연했다. 그리고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생활 속에서도 정신줄을 꽉 붙든 데는 일만큼은 끝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내가 내 일의 모든 것을 정말 즐기는구나 새삼 깨달았다.

새로 옮긴 학교에는 중증 학생이 많고 한 명 한 명 손이 많이 갈 것으로 보이지만 벌써부터 애틋하게 정이 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관심 많고 협조적인 학부모님들이 많아 함께 만들어갈 무엇을 기대하며 설렜다.  어두침침한 구석이 아니라 밝고 활기찬 위치의 교실도 좋았고,  꿈에 그리던 여자배구 드림팀도 나에겐 12년을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엄마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엄마 곁에 있기를 결심한 건, 잘한 결정이다. 이제는 엄마에게 그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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