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어느덧 우리가
종심의 언덕을 넘었다.
멀기만 했던 나이인데
참 빨리도 온다.
돌아보면, 좋은 길도 있었을 텐데
왜 그리 돌아가며
험한 길만 골라 걸었을까.
그래도 말이다.
그땐 그게 맞는 길이라 믿었지.
어느 친구가 그러더라.
“그래도 세상 구경은 실컷 했잖아.”
그 말 듣고 웃었다.
그리고 알았다.
그래, 후회는 없다.
최선을 다해 살아냈으니까.
요즘은
하루가 덤처럼 느껴진다.
바람이 있다면
아프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것 정도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면
내 모습이 좀 서글프고
어딘가 우습다.
살다 보니
삶도, 인연도
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에서 멀어지더라.
마음이 내려앉는 날엔
말보다
조용한 위로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
그럴 때면
문득
네 얼굴이 떠오른다.
네가 잘 나가고
성공할 때마다
부러움과 응원을
같이 품었는데,
부끄러운 자존심 때문에
전화 한 번 못했던 날들이 있다.
크게 이룬 건 없지만
자존심 하나 붙들고
꾸역꾸역 견뎌낸 세월.
이제 와 생각한다.
그래도 참 열심히 살았다.
말수 적고
먼저 연락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 어디엔가
여전히
네 웃는 얼굴이 남아 있다.
그게 참 고맙고,
참 그립다.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두 다리로 걷고
숨이 남아 있고
소주 한 잔 마실 수 있을 때
한 번 보자.
그리고 말이다.
이제 동무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부고장이 날아오면
5만 원 낼까 말까 고민하지 말고
그 돈으로
소주 한 병 사자.
허튼소리 하면서
웃다가 울다가
그러다 잊자.
우린 참 별 희한한 세상을
다 견뎌냈다.
배곺아 소나무 껍질 씹어 먹던 시절부터
초대 대통령 지나
몇 번의 시대를 넘고
이젠
AI까지 같이 있으니.
잃을 것도
욕심낼 것도 없다.
남은 삶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숨 쉬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게 잘 살아낸 삶 아니겠나.
그러니
남은 시간 중 좋은 날 하나 골라
편안히 만나자.
말이 없어도 되고,
침묵이어도 좋다.
그저 같이 앉아 있는 시간.
그걸로 충분하다.
2025.11.24.
잠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