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포 슈가맨
(KILLING FOR SUGER MAN)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오늘부터‘라는 곡으로 그해 모든 대중 음악상을 휩쓴 싱어송 라이터 오후림. 당시 스물 여섯 살이던 그는 ’21세기 유재하‘라 불리울 정도로 데뷔 앨범이 천재성을 인정받은 뮤지션이었다. 데뷔곡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에도 여러 싱글을 발표하지만, 대중과 전혀 소통하지 못했다. 열광적이던 전문 리스너들의 기대는 점점 식어갔다. 신이 떴다, 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수년 간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나서야 후림은 알게 됐다. 자신이 원 히트 원더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후림은 결국 뮤지션의 행보를 멈추고, ’트루먼‘이란 중소 기획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게 된다. 말이 좋아 프로듀서지, 소속 가수 홍보를 위해 영업을 뛰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마흔 여섯이 될 동안, 한때 천재라 불리우던 이 청년은 개저씨가 되어 버렸다.
2024년, 후림이 다니는 회사 트루먼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코어 작곡가 장강평이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강평은 지난 해만 해도 각종 음원차트 TOP10에 자신이 쓴 곡을 세 곡이나 랭크 시킨 인기 작곡가였는데, 아무도 모르게 메이저 기획사 아이엠(IM)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고, 현재 구두 계약이 오간 상태였다. 후림은 어떻게든 강평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놈의 오만방자함은 이미 컨트롤 불가였다. 트루먼 이사진은 강평을 놓친 책임을 후림에게서 찾았고, 이는 대표에게 보고됐다.
강평이 회사를 떠난 그날 저녁, 후림은 J본부의 공CP 그리고 박PD와 미팅이 있었다. 말이 좋아 미팅이지 술접대 자리였다. J본부는 새로운 포맷의 음악 프로그램을 기획 편성 중이었는데 후림은 여기에 회사 소속 걸그룹을 반드시 꽂아 넣어야 했다. 후림은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노래방 마이크를 잡는다. 짖궂게도 공PD는 20년 전, 후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출세작 ’오늘부터‘를 선곡한다. 순간, 후림의 가슴 속에 불덩이가 솟구치지만, 손은 이미 리모컨을 집고 쌈바 리듬 버튼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서정적인 어쿠스틱 기타 멜로디가 경망스러워지면서 분위기는 업됐다. 후림은 눈 질끈 감고 마이크에 목소리를 실었다.
다음 날 아침, 후림은 자신의 집 거실과 현관 경계에서 구두 한쪽만 벗은 채 깨어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외출 준비를 마친 한 여성이 쇼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재희, 후림이 천재라 불리던 시절 눈이 맞아 결혼한 아내로 꽤 이름이 알려진 배우이자 토크쇼 진행자였다. TV에는 연예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고, 여성 진행자는 재희였다. 찬바람 쌩쌩 날리는 지금의 표정과 완전히 다른 호감도 최대치로 끌어올린 표정과 말투로 카메라 앞에서 이번 주 이슈를 소개하고 있었다. 후림의 회사에서 떠난 장강평이 메이저 기획사 아이엠(IM)에 새둥지를 튼다는 소식이었다. 남편 후림의 근황을 묻는 남자 진행자의 얄궂은 질문에 당황해하는 재희의 모습이 화면에 잠시 잡혔다.
후림은 좀비처럼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재희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술 먹고 집에 들어올 때 조심해라. 기사날 수도 있다. 나 소속사에서 말 나오면 책임 질 거냐? 등등. 후림은 비웃는다. 당신 아무리 사고 쳐도 기사 날 일 없다. 사람들 신경 안 쓴다, 등등. 가시 돋힌 말들이 오가가 재희는 후림의 상처를 후벼파기 시작한다. 그러다 퇴물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후림은 결국 화를 폭발시킨다. 재희도 식식대며 집을 나섰다.
17년 전, 결혼할 때만해도 남편(후림)은 이러지 않았다. 남편의 음악적 재능은 음악에 ’음’자도 모르는 재희가 들어도 탁월했다. 무기교에 단순하고 직관적이었지만, 유행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남편이 원 히트 원더 뮤지션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남편은 이제 곡을 쓰는 대신 술에만 돈을 쓴다.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한 건, 작년 이맘 때다. 재희가 출연한 드라마 쫑파티에 후림이 취한 상태로 찾아와 스텝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알던 천재는 죽었다. 아이가 없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언론에 이혼 기사 몇 줄 뜨고 말겠지. 요새 이혼은 용기 있는 자들만 차지하는 훈장이라지. 재희는 이런 생각으로 후림과 살고 있었다.
후림은 답답한 마음에 대학 실용음악과 동창인 이백을 만나러 갔다. 이백은 강남구 신사동에 개인 작업실을 갖춘 꽤 이름 난 작곡가였다. 후림은 이백에게 다시금 곡을 써보기로 결심했노라 말을 전한다. 덧붙여 최근 머릿속에서 멜로디와 가사가 맴도는데, 어떻게 해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며 도와달라고 토로했다. 떡진 머리에 야구캡을 눌러쓰고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를 풍기는 후림을 응시하던 이백은 말없이 자신의 회사 메일함을 열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한번만 들어봐 달라며 데모곡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백은 이메일 페이지를 끝도없이 넘기다 멈추고 진심어린 조언을 한다. 후림아, 하던 거 계속 해라. 넌 과거와 이별해야 산다. 자존심이 상한 후림은 담배를 피워 물고, 이백은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한다며 자리를 비운다. 담배 연기와 한숨을 동시에 내뱉는 후림은 이백이 열어 둔 이메일 목록에서 눈에 띄는 닉네임 하나를 발견한다.
’포스트 재하 (POST JAE HA)’
헛웃음이 나왔다. 후림의 20년 전 별칭이 ‘21세기 유재하’였다. 하지만 난 타칭이었다. 이놈은 자칭이고. 메일 전문에는 시크하게 끄적댄 짤막한 자기소개와 데모 음원 파일 하나가 달랑 첨부돼 있었다. 음원은 제목도 정해지지 않은 ‘TRACK α (트랙 알파)’였다. 후림은 기대 없이 곡을 틀었는데 웬걸...? 도입부 멜로디가 후림의 귓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후림은 멍한 얼굴로 화면 속 미디어 플레이어가 만드는 파형을 바라봤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코드 배열과 멜로디 구성이 기가 막혔다. 가사가 품은 함의도 마찬가지. 이렇게 어려운 시절, 트랙 알파 (TRACK α)와 만난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후림은 해당 메일을 자신의 계정으로 몰래 전송하고, 이백의 노트북에서 포스트 재하의 메일을 영구 삭제한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왔다.
후림은 개인 작업실에 오자마자 곧장 원곡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당신의 음악에 매료됐노라 썼다가 지우고 흥미롭게 들었다며 한번 봅시다,라고 썼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 사이 회사에서는 후림을 퇴출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후림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원곡자의 답신을 기다리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원곡자가 이백에게 보낸 메일에는 휴대폰 번호와 작업실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밀당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수십 번.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도 메일 확인조차 이뤄지지 않자, 후림은 결국 원곡자에게 전화를 건다. 전원은 꺼져 있었다. 이러다 원석을 놓칠 수 있겠다고 생각한 후림은 원곡자의 작업실 주소로 찾아간다.
원곡자의 작업실은 연남동 허름한 주택가 옥탑방이었다. 사람은 없었고, 방 안은 쓰레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 것도 안하고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던데, 원곡자도 그런 부류로 짐작됐다. 하지만 쓰레기 언덕 너머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작업대가 마련돼 있었다. 소박한 사운드 믹서와 스피커, 마이크 등등. 후림의 마음 한켠이 짠해졌다.
입구에서 건물주로 보이는 할매가 나타나 말했다. 여기 살던 청년(원곡자)이 다섯 달치나 방세를 안내고 버티다 날라버렸다고. 할매의 손가락이 옥상 난간을 가리켰다. 할매가 말하길, 원곡자 이름은 ’새필‘이고 나이는 스물 셋 남자였다. 밤이면 밤마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소주를 마시며 기타를 튕기고 노래를 불러 제꼈다 했다. 헌데, 어느 날 올라와보니 등짝에 커다란 날개가 솟아 있었고, 그 상태로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는데... 덧붙이길, 건물 바닥에는 새털과 날개가 살을 뚫고 나오면서 터져나온 핏물이 흥건했다고. 후림은 할매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봤다. 바짓단을 타고 오줌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치매 노인이었다. 실제 건물주는 할매의 남편이자 할배였다. 하지만 할배에게 물어도 청년의 행방은 오리무중. 할배 또한 원곡자가 집세를 감당 못하고 야반도주 한게 분명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인근 경찰서에 찾아가 문의해보니 원곡자는 생활고에 시달려온 젊은 무명 뮤지션이었고 사라질 당시 통장에 구백 구십 칠원이 전 재산이었다 말했다. 이후, 금융거래 이용 내역이나 휴대폰 사용 내역 그리고 인근 CCTV 녹화 내역 등 그 어떤 생활반응도 포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원곡자는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세상에 트랙 알파(TRACK α)라는 명곡을 남기고. 후림은 치매 할매의 말 대로 원곡자가 정말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게 사실이길 바랐다.
늦은 밤, 후림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회사 대표는 권고사직을 통보한다. 회사에서 팽 당하자, 후림은 억하심정에 트랙 알파 (TRACK α)를 표절해 발표하기로 결심한다. 마치 자신이 만든 곡인 양 편곡해 이백에게 먼저 들려준다. 곡을 다 들은 이백은 후림의 이십 대 천재성이 살아난 것 같다며 극찬을 쏟아냈다. 반응은 예상 대로였다. 이후, 후림은 이백과 편곡 작업에 착수한다. 일류 세션과 실력파 보컬이 섭외돼 녹음이 진행됐고 이는 단 며칠 만에 음원 사이트에 공개된다. 원곡이 너무도 훌륭했기에 손댈 곳도 없었다. 제목은 가사 한구절을 그대로 인용해 ’사랑하고 있다’ 로 정해진다. 음원은 발매와 동시에 차트순위 100에 올랐고 무섭게 상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돌이 점령한 각종 음원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회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고, 평단과 언론에서는 해당곡을 작사, 작곡한 이가 오후림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며 기사가 양산됐다. 아이돌 뮤직의 홍수 속에서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놀라운 뉴트로 감성의 곡이 탄생했다며 사방에서 존경과 찬사를 보내왔다. 후배 가수들이 곡을 커버해 챌린지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조회수는 단기간에 엄청난 기록을 달성한다. 후림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되자, 얼어붙었던 재희의 마음도 녹는다. 후림의 진심어린 사과로 재희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후림은 신곡 ‘사랑하고 있다.’가 자신을 묵묵히 참고 인내해준 아내 재희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라며 마케팅 포인트를 잡았다. 꿈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어딘가 살아있을지 모를 원곡자의 존재 때문에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은 현실이 된다.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방송 촬영 현장과 행사장에서 기이한 사고들이 터졌다. 후림은 이것이 원곡자의 소행일 거란 추측을 한다. 표절을 실행에 옮기기 전, 원곡자에게 만나자고 마지막으로 보낸 메일을 다시 열었다. 수신확인이 ’읽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머지않아 돈을 요구하며 놈이 접근해 올 것이다. 그때를 기다렸다가 원만히 합의를 볼 생각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고가 터진다. 이백이 뺑소니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사고를 낸 차량은 도주한 상태고 CCTV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범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백의 장례식장에는 과거 후림의 실용음악과 동문들이 대거 참석했다. 신수가 훤해진 후림에게 앞다퉈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늦은 시각, 자신을 기억하는 이상한 조문객과 조우하게 된다. 이 조문객은 다 썩은 승합차를 몰고 왔는데, ’오리농장’ 이란 조악한 연락처 문구가 차체에 박혀 있었고, 얼굴 곳곳에 고생주름이 가득했다. 조문객은 후림과 같은 대학 실용음악과를 나온 동창이라며 조상식이라고 이름을 밝혔다. 악수를 청하는데 손가락 두 개가 없었다. 그제야 후림의 기억이 살아났다. 대학시절 밴드를 결성해 함께 활동한 키보디스트였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 학교를 떠난 것까지 기억났다. 어찌됐건 지난 세월이 그를 몰라보게 변화시킨 듯 했다. 헤어질 때, 그는 후림에게 신곡 좋더라, 잘 듣고 있어, 라 말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후림의 집 앞에 발신인 불명의 택배 상자가 도착한다. 상자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멜로디는 트랙 알파(TRACK α)였다. 상자를 개봉하자 휴대폰 하나가 덜렁 놓여있었고 벨소리는 더욱 커졌다. 후림은 재희의 눈치를 살피며 집 밖에 있는 차고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자신을 원곡자라고 밝히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성은 표절의 댓가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제안을 거절하면, 모든 사실을 폭로하겠노라 말했다. 올 것이 왔노라 생각했다. 후림은 침착하게, 준비했던 대로 일단 3억을 현금으로 넘기고 나머지는 차차 마련하겠노라 말했다. 그러니 비밀을 일단 지켜달라고. 원곡자는 잠시 머뭇하더니, 약속 장소와 시간을 통보했다. 여덟 시간 뒤였다.
통화를 마친 후림이 차고를 나서는데, 재희가 코앞에 서 있었다. 통화 내용을 모두 들은 눈치였다. 혹시 그 노래, 표절한 거냐고 묻는 재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후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재희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얼굴이었다. 재희는 후림 만큼이나 겁에 질려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남편이 죄를 짓고 협박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방송가에서 쌓은 이미지와 커리어에 영영 복구되지 않을 오점이 생길까봐 두려워서였다. 재희는 경찰에 신고하라 종용했고, 후림은 거절했다. 또다시 바닥을 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격한 말다툼이 오가고 몸싸움이 일면서 재희는 후림에게 밀려 넘어지고 의식을 잃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후림은 일단 재희를 차고에 가둔 채 밖으로 나갔다. 원곡자를 만나 원만한 합의를 본 뒤에 돌아와 재희를 설득할 심산이었다.
은행에서 3억을 현금으로 찾아 원곡자가 요구한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잠원 지구 한강공원 장애인 화장실이었다. 후림은 이곳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대학 동창 조상식이었다.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의외였다. 이런 놈이 원곡자라니...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통화 목소리가 왜 달랐는지, 누구였는지 묻자, 돈 주면 시키는 대로 다해, 너처럼... 이라는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상식은 돈가방을 낚아채듯 빼앗더니, 국도 타고 조금만 나가면 자신의 집이 있다며 술이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금일 저녁, 코리아 뮤직 어워드 시상식이 열리고, 수상자로 내정돼 있어 어렵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식은 막무가내였다. 후림은 결국 상식의 승합차에 오른다.
상식의 차가 숲길을 내달렸다. 비포장 길을 한참 들어가자, 녹지로 우거진 곳에 오리 농장이 나왔다. 차에서 내리자 비린내가 진동하고 오리 울음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상식은 후림을 다 쓰러져가는 막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집 안에는 줄이 다 끊긴 통기타와 각종 음반 그리고 LP 등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스피커와 악보도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한켠에 쓰고 남은 주사기들도 보였다. 약을 하며 살았던 것으로 추정됐다.
상식은 시뻘건 오리탕과 소주 댓병을 내왔다. 소주를 글라스 채로 단숨에 들이키며, 세월 참 야속하다 말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상식은 대학시절 후림의 음악적 재능에 놀란 적이 여러 번 있었노라 말했다. 놀란 적도 있었노라 고백했다. 상식의 정신세계는 손가락이 온전했던 그리고 음악에 순수한 열정을 불태웠던 대학 시절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벽 한켠에는 그의 재학시절 물건들이 잘 보존돼 있었다. 후림이 상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그 곡, 네가 쓴 거 아니지?
내가 알아, 넌 그런 곡 못써.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상식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후림을 올려다보더니, 원곡자가 궁금하냐고 되물었다. 후림이 끄덕이자, 상식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대형 냉동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순간, 후림은 놀라 나자빠졌다. 도어가 열리는 동시에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머리부터 쿵- 하고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젊은 청년의 시체였다. 상식은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아 혀를 찼다. 시체는 연남동 옥탑방에서 홀로 살다가 사라진 그 청년이었다. 그리고 조상식의 아들이었다.
후림은 이제 사건의 전말이 그려졌다. 조상식의 아들 조새필도 아빠를 닮아 음악을 했던 것이다. 조새필은 자신이 쓴 데모곡 트랙 알파(TRACK α)를 이백의 회사 계정으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후림이 중간에 가로챈 것이고. 내막을 알지 못한 상식의 아들은 그 사이 술에 취해 옥탑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 집에 방문한 상식이 시신을 수습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리라... 그리고 아들의 죽음의 원인을 파헤쳤을 것이다.
헌데, 저 놈 아들 죽은 것이 왜 내 책임인가? 타임라인을 따져보면 내가 곡을 발표하기 한달 전에 이미 아들은 사망했다. 내 책임이 아니다. 딱하지만 원곡자는 지 아빠를 닮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가난과 창작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리라... 아무리 논리를 세워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조상식의 생각이었다. 상식은 불행한 세월을 보내오며 지독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이 모든 불행이 아들의 곡을 훔쳐 인생 역전에 성공한 후림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상식은 날이 선 식칼을 들고 와 위협했고. 후림은 있는 힘껏 그를 밀쳐내고 농장을 뛰쳐 나왔다.
국도변까지 뛰어나와 내달리는 후림에게 영상이 첨부된 문자가 전송됐다. 상식이 보낸 것이었다. 첨부된 영상을 본 후림은 한번 더 충격에 휩싸인다. 상식에게 납치된 재희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차 싶었다... 후림이 집을 나와 돈을 준비하는 사이, 상식이 집에 몰래 난입해 재희를 납치해 간 것이었다. 상식과 통화가 연결된다. 그가 말했다. 오늘 있을 ‘코리아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표절 사실을 밝히고 죽은 원곡자에게 사죄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기자회견을 열어 모든 사실을 폭로할 것이며, 네 아내도 더 이상 못보게 될 거라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붙잡힌 아내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림은 괜찮을 거라며 자신이 해결하겠노라 안심시키지만, 재희의 독설과 괴성이 들려왔다. 자신의 돈, 자신의 명성, 자신의 커리어, 모든 것을 후림이 망쳐놓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상식은 다시금 재희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경찰에 신고해도 결과는 같을 거라는 말과 함께 상식은 전화를 끊었다. 후림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후림은 초췌한 몰골로 수트를 입고 코리아 뮤직 어워드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현업 관계자들이 착석해 있었다. 후림을 해고시킨 ’트루먼‘ 이사진과 대표도 보였다. 후림은 객석 구석에 앉아 불안과 초조함에 몸을 떨었다. 후림의 수상이 예정된 부문은 ‘2024 올해의 노래’였다. 여성 진행자는 후림의 아내 재희로 내정돼 있었으나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면서 펑크가 나고, 새인물로 대체된 상태였다. 속사정은 후림만이 알고 있었다. 화려한 축하공연이 시작됐다.
빛나는 수상자들이 무대를 오르내리고, 드디어 올해의 노래 부분 시상이 시작됐다. 시상자는 작년 수상자이자 후림을 배신하고 떠난 장강평이었다. 강평의 입에서 수상자 후림의 이름이 나오자, 커다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대 중앙 스크린에는 20년 전 후림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상을 수상하던 모습이 담긴 녹화영상이 흘러나왔다. 단상에 오른 후림은 마이크 앞에 서서 입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객석을 바라봤다. 눈가는 촉촉해지고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같은 시각. 상식은 재희를 의자에 묶은 채로 TV를 보고 있었다. 후림의 자백이 이제 곧 세상 곳곳에 퍼져나갈 터였다. 하지만 후림은 예상을 뒤엎고, 자백과 참회 대신 준비된 수상소감을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상식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재희는 포박을 풀고자 죽을 힘을 다한다. 하지만 상식의 칼이 그보다 먼저 재희의 목을 겨누고, 칼끝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괴한들이 막사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날카로운 흉기로 상식의 몸 곳곳을 쑤셔댔다. 상식의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사방에 피가 난자됐다. 이들은 후림이 고용한 청부업자들이었다. 의자에 묶인 채로 바닥에 쓰러진 재희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괴한 중 하나가 그녀를 발견해 다가왔다. TV 화면에는 후림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긴 슬럼프를 극복하는데, 아내 재희의 도움이 가장 큰 힘이 됐노라 말하며 사랑해라고 말했다. 현업 관계자들과 선후배 뮤지션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진심어린 응원을 보냈다. 상식과 재희를 모두 처리한 괴한들은 불을 질렀다. 수상소감을 마친 후림에게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수많은 꽃다발이 무대위로 쏟아졌다. 후림의 얼굴에는 웃음과 울음이 뒤범벅돼 있었다.
다음날. 오리농장은 잿더미가 되어 발견된다. 잿빛 하늘에선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경찰과 감식반 그리고 구급대가 우비를 입고 현장을 수습 중이었다.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초췌한 표정의 후림은 시상식 복장 그대로 형사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 부근에서 재희의 휴대폰 신호가 마지막으로 꺼졌다는 말이 전해졌다. 형사는 아내분(재희)과 마지막 통화를 하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묻지만, 후림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끊었노라 답했다. 그리고 한참을 더 현장에 남아 있었다. 비에 젖은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비추려는 듯이.
감식반들은 잿더미 속에서 타고 남은 물건들을 꺼내왔다. 조상식이 대학시절 쓰던 오래된 악보부터 카세트 테이프와 LP판, CD 플레이어 등등. 가난한 뮤지션의 소지품들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것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후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소형 카세트 녹음기였다. 순간, 후림은 그것이 20여 년 전, 자신이 늘 소지하고 다니다가 잃어버린 녹음기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당시에 직접 새겨 넣은 이니셜도 남아있었다. 후림은 녹음기에 넣어진 테이프를 재생했다. 오래돼 뭉개진 사운드 속에서 이십 대 초반 청년 풋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통기타를 치면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멜로디와 가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후림은 그것이 이십대 시절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스무살 청년에게서 날것으로 튀어나온 멜로디와 가사는 트랙 알파 (TRACK α)의 원형이었다. 원곡자는 스무살 시절의 후림 자신이었던 것이다. 충격과 경악에 휩싸인 중년 후림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