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교회에서 담임목사, 경남 성경 학교 교장으로 활동
프랭크 윌리엄 커닝햄(권익함, 1887~1981) 선교사는 29년 동안 이 땅에 거주하며, 진주 교회를 담임하고, 신약 성경의 번역 위원으로 활동한 선교사이다. 호주 선교사 중에서 가장 한국어에 능통한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87년 12월 호주 빅토리아 주 킬모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12남매 중 장남이었다. 1908년 멜버른 대학에서 고전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오르몬드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진주에서 함께 사역한 아더 알렌(안란애)과 오르몬드 신학교 동기이다. 당시 호주 선교회가 한국 내륙에 선교하기 위해 선교사 파견을 확대하는 시점이어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는 1913년 1월 내한하여 진주 선교부로 배속되었다. 먼저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언어 능력이 탁월하여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자까지 이해하였다. 당시 호주 선교사 중에 가장 한국어가 뛰어난 선교사로 손꼽힌다. 또한 1917년 11월 미국인 선교사 트레이쯔만(Catherine Treischman, 일본에서 사역)와 교제하고, 결혼했다.
1913년부터 진주 외곽의 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서 1932년까지 알렌 선교사에 이어서 진주교회의 당회장으로 일했다. 진주 교회를 담임하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거창, 함양, 합천 지방을 순회하였다. 그가 관할했던 교회로는 거창군 가천 교회, 위천 교회, 함양군 함양 교회, 합천군 초계 교회, 구원 교회 등이 있다. 그기 일정 기간 담임으로 사역한 후 한국인 사역자에게 교회를 인계하고 자치적으로 운영토록 하였다. 1936년 전후에는 의령 지역(서암 교회 등)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다.
그는 진주에서 경남 성경학교 교장으로도 사역하였다. 경남 성경학교(1911년 개설)는 광림 학교 내에서 사역자와 평신도 대상으로 신학교에 준하는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후일 이곳을 수료한 학생들이 평양 신학교에 가서 추가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다.
1926년부터 구약 및 신약 성경 개역 위원으로 선임되어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번역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크레인, 남궁 억과 함께 세 사람이 마태복음, 사도행전을 개정하였고, 1933년 요한복음, 누가복음, 빌립보서를 개정하였다. 그래서 신약 성경 개정 작업 10년 만인 1937년 전 신약성경 개정 작업을 완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06년 공인된 <신약젼셔> 나온 지 30여 년 만에 개정된 신약 성경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1939년 10월 안식년으로 호주로 돌아갔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운이 감돌아서 호주 선교사의 한국 파송이 중지된 것이다. 그래서 1941년 6월 선교사 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하였다. 선교사를 사임 후 그는 호주에 머물면서 링우드 크로이돈 지역 교회의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조선 신학교에서 교수로 초청되는 등 한국 교계의 요청으로, 1947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6.25 전쟁의 발발로 3년 만인 1950년 다시 호주로 돌아갔다. 호주로 돌아간 후 브람스홈에서 은퇴 시까지 목회자로 일하였고, 1981년 8월 호주 성 안드레 병원에서 94세를 일기로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