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출발 앞에서, 나를 정리하는 시간
얼마 전에 박사 학위 과정을 마쳤다. 박사가 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입학한 것이 2017년 9월이었으니, 정확히 8년이라는 긴 시간을 달려온 끝에 얻은 결과다. 그동안 나는 연구실을 직장인처럼 출퇴근하며 실험을 이어갔고, 동시에 삶의 중요한 사건들도 겪었다. 결혼을 했고, 첫째와 둘째 아이까지 태어났다. 실험과 보고서, 논문과 학회 사이에서 삶을 꾸려온 지난 8년은 그야말로 다채롭고 치열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입학할 때 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졸업만 하면,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박사라는 호칭이 주는 무게가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 줄 거라 믿었다. 좋은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사회적으로도 한 단계 올라선 듯한 안정감을 느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 내 현실은 조금 다르다. 둘째가 태어난 지 이제 겨우 6개월이 지나, 나는 사실상 자체 육아휴직 상태다. 손에 쥔 학위증과 매달이란 새로운 달력 외에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하거나 후회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졸업을 했으니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문제는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내가 나 자신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8년간 학생으로 살아왔지만, 이 길을 그대로 이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여전히 헷갈린다. 그렇다고 학위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길을 택하기도 아깝다. 나의 시간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니까. 어쩌면 내가 나를 잘 모른다고 느끼는 것은, 아직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정리, 곧 ‘나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마음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불안이 늘 곁에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불안장애를 앓고 있었을 것 같다고 추측한다. 대학원에 들어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지만, 이미 30년 가까이 쌓여온 불안은 내 삶을 뿌리 깊게 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두 번의 출산을 겪으며 산후우울증까지 지나왔다. 다행히 지금은 훨씬 좋아졌지만, 불안과 우울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문득 자신감이 무너지고,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더욱 나의 마음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으로 바빠질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면서, 아마 매일이 정신없이 흘러갈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잠시 멈추어 서서 나를 되돌아보고 싶다. 내게는 불안도 있고, 좌절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버텨온 힘도 있다. 8년의 과정 속에서 배운 것은 단순히 전공 지식만이 아니다. 어려운 실험을 끝까지 해내는 끈기,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하루하루를 이어온 회복력,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며 얻은 삶의 지혜까지. 그것은 학위증에 적히지 않지만, 내 안에 분명히 자리한 자산이다.
앞으로의 길은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가는 마음으로 나아가려 한다. 모든 길이 훤히 보이진 않겠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는다면 적어도 발 앞을 비출 빛은 생길 것이다. 언젠가 돌아보면 이 시기가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