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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나무 Mar 02. 2024

너를 다시 만나다

어름새꽃(복수초)



 

   입춘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바람이 매섭다. 지난겨울은 유독 눈도 많이 오고 한파마저 길었다. 겨울의 숲은 더욱 고요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봄을 만나지 못하는 생명들이 여럿 생겨날까 봐 맘이 쓰였다. 내년에도 만나자고 인사를 했던 꽃과 나무들이 무탈하게 봄을 맞이하기를 바라며 겨울 숲을 서성이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봄이라고 말하기엔 이른 겨울의 끝자락에 눈을 녹이고 나와 봄을 알리기에 <어름새꽃>, 복과 장수를 가져다준다고 하여 <복수초>라고 불린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이 있다.
  어름새 꽃은 에너지를 축적해 열을 내는 성분을 만든다. 2월에 꽃망울을 올리기 시작해 3~4월에 꽃을 피우고, 5월에 시들기 시작해 씨앗이 여물기도 전인 6월이면 길고 긴 겨울잠에 든다. 다른 식물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잎이 무성할 때 휴식기에 들어가 연중 절반을 휴면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뿌리는 잠들지 않고 양분을 흡수하고 에너지를 축적한다. 이렇게 얻은 영양분은 2월 한낮 한결 따스해진 햇볕에 눈이 살짝 녹으면, 수분과 결합해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그때 열이 발생한다. 그리고 겹겹의 꽃잎이 활짝 피면 마치 오목한 반사경처럼 돼서 햇볕을 가운데 모아 꽃 내부를 따뜻하게 데우고, 추위에 움츠린 곤충들을 불러들인다. 게다가 꽃잎이 노란색인 덕분에 열이 잘 흡수되고, 땅 빛깔과 배색을 이뤄 곤충의 눈에 잘 뜨인다. 정말 영리한 생존방식이다.


   성임 반복하던 어느 날, 름새꽃의 꽃봉오리를 발견했을 때는 어찌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일행을 불러댔다. 작년에 만났던 그 자리에 땅을 뚫고 나와 눈얼음을 햇살에 녹이고 있었다. 녹고 있는 얼음이 땀방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추운 날에 땀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용히 숨죽여 바라본다. 겨울외투에 모자, 장갑까지 장착하고 나온 내가 왠지 멋쩍다.



그런데 2월 중순에 폭설이라니!



   폭설이 내리는 내내 애가 탔다. 지난 초여름부터 다른 누구보다도 올봄을 위해 힘들고도 긴 인내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걸 알기에, 혹시나 폭설에 얼어버리면 어쩌지, 그래서 너의 인내의 시간이 사려져 버리면 어떡하지, 올해는 너를 만나지 못하는 걸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겨울 동안 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겨울 에서, 긴 시간 땅 위로 올라갈 날만을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했을 텐데. 다시 찾아온 겨울눈은 너무나도 작고 여린 생명에겐 혹독한 마지막 시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너의 안녕을 바랄 뿐이다.

   

   




    드디어 눈이 그치고 너를 만나러 간다. 너를 만났던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설렘과 불안함으로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장소에 다다르자 노란빛으로 주위가 환하. 올해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아름다운 노란빛으로 알리고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꽁꽁 얼어 딱딱하고 메마른 땅, 작은 풀 한 포기도 허락해주지 않은 혹한의 겨울 숲. 그 끝 언저리에서 나무들 틈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을 받으며 홀로 빛나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갔었. 그때 햇살 때문에 빛났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로 인해 주위마저 밝게 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과 폭설도 이겨낸 너의 강인함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도 작고 여린 몸으로, 이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을 견뎌냈구나. 이렇게 아름답고 강한 힘 어디에서 나오는 거니?'


   봄을 마주하려던 순간 다시 찾아온 폭설로 끝내 못 볼 줄  알았다. 너를 끝까지 믿어주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 내년에 또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지켜준 네가 고마워서 마음이 뭉클함으로 차오른다. 힘든 인내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너를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리어 위로와 응원을 받는 건 나다.


 "나도 해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나의 시간을 믿고 기다려준 것처럼, 당신의 시간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당신의 힘을 믿고 나아가세요."라고.




  

    이 작고 여린 생명은 눈도 아직 녹지 않은 이른 봄날, 꽁꽁 얼어있는 땅을 스스로 녹이고 나온다. 그리곤 다시 시작할 때라고 주변을 밝은 희망의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내게 필요했던 건 그저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도 살아남아 희망을 건네는 작은 생명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생명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기에,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나면 이렇게 피어나 세상을 따뜻하게 밝힐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믿어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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