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배우는 시간 ㅣ 코르넬리아 토프 ㅣ 장혜경 ㅣ 서교책방
좋아하는 수필가 피천득은 그의 책 <인연>의 일부분을 통해 '너무 많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20세기 중반에도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세상을 점령'해 버렸는데, 21세기가 시작하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야말로 너무 많은 것들이 이 세상을 압도적으로 지배해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종종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뛰어넘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벗어나, 그야말로 허우적거리다 익사해버릴 지경에 이를 느낌이 든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 하루 원종을 눈과 귀가 사로잡힌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시기와 질투 그리고 비아냥이 섞인 글들이 세상을 채색한다. 그 와중에 마주할 수 있는 따뜻한 미담도 적지 않겠으나, 무엇보다 분명한 것 중 하나는 시각과 청각이 주체적인 입장이 아닌 종속적인 입장으로 피로가 누적됨을 모른 채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 말이란.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과 같아 버렸는지 모른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 말 대신 글이 있고, 글 대신 사진과 좋아요 버튼이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날의 지구의 모습이다. 비약이겠지만 응당 그래 보인다.
"말이 넘쳐나는 세상 속, 더욱 빛을 발하는 침묵의 품격'이란 부제로 펼쳐지는 두껍지 않은 적당한 두께감의 이 책은 단연 2024년 내가 발견한 최고의 책 중 하나다. 세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종종 이런 책을 마주할 때 나는 흡사 오르가슴과 유사한 '북르가슴'에 빠진다. 이건 정말 미친 기분이다!
결코 지루하지 않은 분량의 사례와 해당 사례가 지목하는 정확한 이해를 요구하는 지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확할 만큼 통용된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비단 10대뿐만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자주 하지 않는 노년층뿐만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침묵이란 콘텐츠가 그리고 침묵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게 필요로 된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과하게 부풀려진 상황에 빠뜨리지도 않아서 더욱 좋다. 읽다 보면 내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누군가의 이야기로 충분히 덧씌워질 만큼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왜 침묵이 중요한지. 그리고 침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저자는 강한 어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한눈에 사로잡을 언변으로 이야기를 풀어 낸다.
9개의 챕터 끄트머리에 있는 '침묵의 수업'만 별도로 발췌해서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읽고 싶을 정도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침묵은 스스로를 감추는 것을 뛰어넘어,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풀어나가는 마법의 열쇠가 된다. 한 마디 더 말하기 보다 한 번 더 쉬어 나가는 자세. 정해진 시간에 최대한 많은 말을 하기 보다 침묵의 시간을 통해 더 효율적인 전파가 필요한 자세를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작정하고 깔 땐 할 말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반대로 너무 좋은 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좋다고 설명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이 표현은 정말 좋은 것을 설명할 때 사골처럼 늘 우려먹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연유로 정말 좋은 책이다. 어떤 직업, 어떤 연령,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몰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책이다. 감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비로소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은은한 파스텔 톤의 배경에 그려진 풍성한 나무 사이로 비행하는 두 마리 새가 표지에서 눈에 띄었다. 침묵이란 표지에 담긴 이 심플하고 정갈한 자연의 한 풍경. 바로 그것과 동일한 느낌일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역시, 그 침묵의 순환을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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