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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리 Sep 19. 2023

[오늘#2] 의류건조기

평범한 직장인의 김치같은 오늘#

 오늘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종일 받은 자잘한 스트레스를 머리속에서 지우기 위해 멍때리며 아무 생각없이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의 머리에 묻은 스트레스와 마찬가지로 나의 옷에 묻은 먼지를 집 안에 떨어뜨리기 싫어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아내가 오더니 "짜잔~" 이라고 한다. 돌아보니 아내의 손에 옷걸이 하나가 들려있다.



"이게 뭐야?"
"아니~~ 오빠가 맨날 옷에서 냄새난다고 해서 하나 사봤지~, 이걸 쓰면 옷에서 냄새가 안난다고 해서 사봤어. 온라인에서 샀는데, 남아있던 포인트 써서 3만원이나 할인 받았어. 원래 8만원인데"
"그래? 이렇게 쬐끄만데? 작은 의류건조기네?"
"글치~~ 효과가 어떤지 일단 한번 써봐야 겠어~!"


아내가 산 소형 의류건조기. 전자식 모터가 달린 옷걸이다.



  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내가 하는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짧은 대꾸를 하고,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간단히 씻고, 저녁을 먹고, 초등학교 4학년 이쁜 우리딸의 오늘 일상에 대해 묻고 들으며 오늘 하루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나갔다. 우리딸이 씻고 잘 준비를 하는 중에 난 내 취미활동(?)을 하기 위해 작은방으로 왔고, 조금있으니 우리딸은 씻고 나와 내가 있는 작은방에 와서 또 조잘조잘 이런저런 말을 한다. 자기 할말을 다 했는지, 아니면 나에게 말을 거는 동안 감은 머리가 다 말랐는지, 이제 자러 간다며 인사하고 간다.


  우리딸이 자러 간 뒤,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또 내가 있는 작은 방으로 온다.



"왜?"
"아까 말햇잖아. 한번 해본다고."
"뭘? 아. 그거? 한번 해보게?"



 오늘 배송 온 작은 의류 건조기를 기어코 써보겠다는 우리 마나님. 아내는 그런 성격이다. 해보고 싶은것, 해야 할건 바로바로 해버리는 성격. 그렇게 내가 집 밖으로 담배를 피러 나갈 때만 한번씩 입는 티셔츠를 옷걸이 같은 작은 의류건조기에 걸고 작동스위치를 켰다. 소음이 조금 있지만, 뭐 그렇게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나 요 앞 편의점에 갔다 올게."
(활짝 웃으며) "나갔다 오게?"
"응. 왜? 뭐 사올거 있어?"
"아니, 의류건조기 아까 켜놨었잖아."
"아. 맞다."



  아내와 함께 작은방으로 갔다. 의류건조기를 끄고 나에게 티셔츠를 건네줬다. 난 무심코 입었다. 그런데...


  '오~ 이거 뭐지? 옷이 뽀송뽀송하네? 아무 냄새도 안나고? 크기는 작지만 성능은 좋네.' 라고 생각했고, 이어서 츄리닝바지도 입었다. 그런데... 츄리닝바지가 꿉꿉하다. 뭔가 허벅지와 종아리에 더 들러붇는것 같은 느낌이다. 방 안에 있는 습도계를 봤다. 습도는 59퍼센트다. 습도도 높지 않은데, 꿉꿉하다니... 이거 왜이러지?


  내가 츄리닝 바지에서 느끼는 꿉꿉함의 원인은 작은 의류건조기에 걸려 있던 티셔츠였다. 티셔츠는 의류건조기로 인해 뽀송뽀송해진 반면 츄리닝 바지는 그냥 그대로 두었으니, 같은 면소재의 의류지만 착용감이 다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편의점을 갔다 오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20년이 넘게 다니면서 또 이직도 하면서, 여러 회사를 거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머리를 모으며 프로잭트를 진행했던게 수백개는 된다. 그러면서 나는 항상 프로잭트에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나 방법을 제시했고, 제시된 아이디어가 묵살되는 건 수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다. 그럴때마다 난 '아니, 왜 이렇게 좋은 방법을 생각도 안해보고 무시할까?' 라며 화를 내기도 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혹자는 '당신의 아이디어가 참신하지 못해 그랬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물론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아예 그냥 논의 한마디 없이 말 그대로 '묵살'당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내가 제시했던 아이디어가 내 상관을 통해 살짝 각색되어 채택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말단 사원이었을때 겪은 이런 경험은 연차가 쌓이면서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어느새 프로잭트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아이디어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제는 이전과는 다른, 하나의 프로잭트만을 위한 방향과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입장이 아닌, 회사 전체의 경영과 사내 문화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다. 효율성을 끊임없이 찾는 회사라는 곳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업무행태이겠지만, 말단사원때 겪었던 '아이디어 묵살' 행위는 여전히 존재했다.



  꿉꿉한 츄리닝 바지와 뽀송뽀송한 티셔츠. 난 옷걸이 만한 작은 의류건조기를 구매하기 전 아내가 고민했을 때도, 구매하고 나서 장단점을 말할때도, 티셔츠를 건조하기 위해 작동을 했을 때도 의류건조기에 대한 생각이 1도 없었다. 그런데, 건조된 티셔츠와 건조되지 않은 츄리닝 바지를 같이 입어봤을 때 비로소 소형 의류건조기의 성능에 대해 감탄했다. 결과를 직접 겪고나서야 비로소 소형 의류건조기를 구매하려고 고심하던 아내의 '아이디어'를 난 '묵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뽀송뽀송한 티셔츠와는 다르게 꿉꿉한 츄리닝 바지는 영 불편했다. 좀 더 쾌적한 하나의 옷과 그렇지 못한 또 다른 옷을 같이 입게 되니 그간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곳에서 '불편'이 느껴진 것이다.



  회사에서도 많이 느껴봤던 상황이었다. 지금 회사에 이직해 온 건 6년 전이다. 그 전 회사에서는 두세차례의 과도기를 지나 사원들 전체가 직접 테스크포스팀을 꾸려 업무 문화를 바꿔갔고, 그 중심에서 활동하던 난 거의 대부분의 회사 시스템을 약간씩 개선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이때는 난 지금처럼 중간관리자도 아닌, 프로잭트를 수행하는 실무자였다. 그러나 전 회사에서는 앞에서 말한 과도기를 겪으며, 중간관리자급의 선임들이 줄줄이 퇴사를 하여 요즘말로 '고인' 회사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무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선책을 찾아갔고, 당시 회사에서는 적극적으로 개선책을 수용해주어 느리지만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회사였다. 그러나 당시 관리자들의 줄세우기 행태, 업무성과에 대한 가로채기 등에 환멸을 느껴 결국 동종업계의 스타트업 회사로 이직을 결심하였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회사는 다르겠지, 공정한 업무행태와 경쟁에 의한 공정한 성과가 주어지는 회사일거야. 만약 아닌것 같으면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어!' 라는 생각으로 휴식기간도 없이 바로 이직하여 업무를 시작하였고, 그렇게 벌써 6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동종'업계로 이직한 것을... 매우 전문적인, 업계에 종사하는 인원이 전국 약 3천명도 안되는 매우 좁은 바닥에서 이직을 한 것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스타트업 회사는 말 그대로 회사만 스타트업이지 소속된 관리직들은 '고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난 이직을 하며 중간관리자 직책으로 왔지만, 여기서도 내 아이디어와 방향성은 '묵살'되거나 시간이 흘러 상위 관리자의 업적(?)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꿉꿉한 츄리닝과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만약 불편함을 느껴 개선점을 찾을 때는 언젠가 내가 제시했던 아이디어를 차용하였고, 그럴때마다 난 과거의 PTSD가 생기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전부라고 느끼기도 한다. 자신의 세상에서 좀 더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본인의 시간이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본인이 겪은 경험이 거의 정답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의류건조기 없이 40년 넘게 살아왔다. 의류건조기는 없어도 내 삶이 불편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산 의류건조기로 건조한 티셔츠를 입어보고 좀 더 상쾌함을 느꼈다. 물론 매우 불쾌하거나 매우 불편한 건 아니고, 참을 수 있는 불편함이다. 그런데, 의류건조기가 있었다면 불편함을 참고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마찬가지로 동료의 아주 작은 아이디어라도 한번쯤 반영해보려고 생각해본다면 도처에 널린 작은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없을것을 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눅눅한 츄리닝 바지와 뽀송뽀송한 티셔츠였다.



나의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사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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