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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리 Sep 21. 2023

[오늘#4] 하이패스

평범한 직장인의 김치같은 오늘#

  한달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정이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경주까지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네비게이션으로 경로와 시간을 검색해보니 자동차로 운전했을 때 편도만 5시간이란다. 중간에 쉬는시간 하나도 없이 달려도 5시간. '아... 너무 먼데, 가지 말까?' 그렇지만 가야만 한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내 삶의 중심 기조 중 하나였던 '경쟁력 강화'. 경주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해야 내 커리어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대충 씻고, 물 한잔만 마시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새벽 6시. '아차차. 커피!' 아파트 앞 상가의 편의점에 들러 빨대커피 하나를 산다. 이제 출발~! 아자~!


경주의 관문 경주톨게이트. 경주의 냄새가 난다.


  솔솔 오는 졸음을 물리기 위해 중간에 휴게소를 3곳이나 들러가며 여차저차 6시간만에 경주에 도착했다. 이미 오전 발표는 거의 다 끝난 상황. 처음 학회에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 부터 오전 발표는 포기했다. '어차피 오전발표는 기조강연이라, 또 고루한 말씀만 하셨겠지 뭐...'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오후발표를 기다린다. 


  멀리서 온 만큼, 오후 6시까지 진행된 발표와 토론을 잠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듣는다. 발표자의 논지, 자료수집의 타당성, 발표 태도 등을 메모하며 11월에 있을 내 발표의 재료로 삼는다. 토론은 또 토론대로 발표자와 토론자간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우... 제발 11월 학회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말아라...' 


  학회를 마무리하고, 저녁만찬은 참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술이라, 경주까지 가서 저녁시간에 술에 취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학회장을 빠져나와 미리 예약했던 숙소로 갔다. 대충 짐을 풀고 경주의 핫플레이스 황리단길로 가서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한쪽에서는 쎄시봉 아저씨(?)들이 초청된 음악회도 하고 있어 북적북적댔다. 사람구경, 밤거리 구경, 멋진 조명으로 비춰진 문화재 등을 내 눈에 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왔다. 밤에는 가지 못하는 박물관에 가서 관람을 하고, 우리딸이 좋아할 것 같은 경주빵을 사서 다시 집으로 출발했다. 기와지붕으로 만들어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경주의 관문. 경주톨게이트가 앞에 보인다. 자연스레 하이패스 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고 통과~. 그런데, 엉? 왜이래 이거?? 



"하이패스가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영업점을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왜 안되지? 단말기가 고장났나?

  이미 늦었다. 난 톨게이트를 통과했고, 통과하자마자 나타난 갈림길에서 이미 우회전을 하고 있었다. 

  아.. 뭐지? 이거 어떡해야 하지? 영업점을 방문하라고?? 영업점은 지나갔는데... 다음 영업점은 어디있지? 다음 톨게이트에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나? 아니면, 휴게소에 가면 영업점이 있으려나?

  

  경주톨게이트를 나와 5분정도를 달리는 동안 해결책을 찾기위해 혼자만의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그래. 다음 휴게소에 가면 영업점이 있을거야. 휴게소로 가보자.' 다음 휴게소는 35km 앞. 그렇게 십 여 분을 달려 휴게소로 들어갔다. 그런데, 영업점이 없다. '하... 다음 톨게이트로 나가봐야 하나...'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운전을 하며 또 해결책을 찾기 위해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는 경주톨게이트를 나오면서 들었던 저 문장만이 거센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같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공부 겸, 머리도 식힐 겸 경주에 왔다가 산뜻한 마음으로 라디오도 듣고 음악도 들으며 운전하고 귀가하려는 내 계획은 이미 머릿속 저 끄트머리에 찌그러져 보이지도 않았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가자!' 네비게이션이 안내해주는대로 그냥 따라간다. 라디오를 켰지만, 쓰나미처럼 휩쓸고 간 뒤의 멍해진 내 머릿속은 DJ의 멘트도, 음악도 들여주지 않는다. 


  하이패스 불인식 문제는 약 한시간 뒤 낙동 톨게이트를 지나며 해결되었다. 자동인식프로그램이 설치되어있어 모든 차선이 하이패스인 낙동 톨게이트는 고속도로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 말 그대로 '하이패스'다. 그냥 지나가는데, "통행요금 8천9백원이 처리되었습니다." 라는 멘트가 들려온다. '아! 이거구나... 이래서 경주톨게이트에서 인식되지 않았다고 했구나' 수도권 순환 고속도로처럼, 고속도로 시작지점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중간에 위치한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한시간을 고심했구나...'


  하이패스 불인식 상황에서, 내 차에 설치한 단말기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면 어땠을까. 단순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가 아니라, '여기에서는 인식되지 않고, 약 한시간 뒤에 당신이 지나갈 하이패스에서 요금이 정산될거야' 라고 해줬으면 어땠을까. 괜히 단말기와 도로공사가 야속해진다.




  회사는 지시와 수행, 검토와 보완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결과물을 내는 곳이다. 이런 과정에서 난 내가 지시받은 업무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선임에게 물어도 보고, 대들어도 보고, 싸우기도 하며 일을 해왔다. 지시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는 말단사원일때를 상기하며 좀 더 자세히 설명하여 지시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설명이 부족하면 어김없이 팀원의 수행 결과물은 옆 산으로 가 있었고, 이럴때는 가고자 하는 산으로 가기 위해 힘들게 다시 내려오는 일을 반복하여 겪으면서 '지시의 방법'을 고민했던것 같다. 


  간간히 옆 부서의 부장이나 팀장이 업무지시를 너무 성의 없이 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건너를 슬쩍 보면 지시받는 실무자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멍한적이 있는데, 그럴때는 몇분, 몇시간 뒤에 어김없이 다시 지시를 받는 모습을 보곤 한다. 다시 지시를 하는 지시자는 처음보다는 격앙된 말투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곤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처음부터 저렇게 설명해주면 좀 좋아...'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리더는 지시만 해서는 안된다. 지시를 했으면 경험이 적은 실무자들에게는 원칙적 실무방법을 설명해줘야 하고, 경험이 많은 실무자에게는 경직된 실무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줘야 한다. 지시만하고 실무의 방법을 알아서 하라는 식은 경험이 적은 실무자에게는 아마추어적인 성과물을, 경험이 많은 실무자에게는 뻔한 성과물을 받게될 뿐이다. 이렇게 일을 하면, 실무자의 결과물에 준하는, 아마추어적이거나 뻔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팀의 리더일 뿐이다. 




  자세하게 설명하는 행위는 좀 더 많은 시간과 정신력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두,세번의 설명과정을 해야 할 수 있고, 두,세배의 시간과 정신력을 들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의 일은 사람과 사람이 합니다. 설명하는 이는 본인의 의도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듣는 이는 설명이 끝났을 때 본인이 이해한 내용을 요약하여 다시한번 설명한 이에게 짚어보세요. 피드백은 대면하여 주고 받는게 오해가 생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나의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사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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