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간접)흡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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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공항에 내려 베를린 시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3-4층 정도의 창밖으로 상의를 입지 않은 남자 둘이 고개를 내민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습지만 그때 갑자기 베를린이다, 라고 느꼈다.
알파카가 베를린 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어디서 흡연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공간에 갔을 때 흡연 장소부터 섭외해둔다는 것이 비흡연자인 나에게는 좀 낯선 프로세스다.
“그런데 어디서든 피울 수가 있는 거야. 여긴 흡연자들을 위한 도시구나, 생각했지.”
처음 ‘베를린’을 느꼈던 장면에 흡연자들이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흡연에 관해서라면 베를린은 서울과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베를린의 흡연-프렌들리한 특성 때문인지, 베를린에서 내가 사귄 친구들이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베를린에서 사귄 친구들의 80%정도가 흡연자라는 점에 관해서 말이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친구들이 거의 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지정성별 여성이고, 아직 한국 사회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은은하게 (혹은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친구들이 담배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우거나, 아예 피우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베를린이 흡연 행위에 있어서 모든 성별에게 비교적 더 자유롭다는 것은 나의 베를린 친구들 8할이 흡연자인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흡연자 친구가 많아진 것 말고도 여러 가지로 흡연 문화의 차이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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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베를린은 간접흡연에 관대하다.
어느 정도냐면 무려 길빵이 가능하다. 얼마 전에 8명 정도가 저녁 식사 후에 같이 이동하는데 거의 나만 빼고 다 흡연자였다. 모두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빨간 불꽃을 들고 걸었다. 거대한 길빵 그룹이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길에서 상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기다려주거나 문을 잡아주는 행위를 지향하는 것을 넘어서 즐기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기다려주지 않거나 먼저 하려고 한다거나, 문을 안 잡아준다면 한국에서보다 더 배려심 없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길빵’에 대해서 하나도 안 무례해하고 관대하다는 점이 좀 신기하다.
지난 주에는 카페에서 나와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요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혹시 멈춰서 피울래요?”라고 물었더니, “베를린에서는 걸어가면서 피우는 거 좋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할 수 없어요.”라고 했다. 요나는 한국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길빵은 외국인도 느낄 정도로 한국에서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문화인 것이다.
실내 흡연 역시 대부분의 바에서 가능하다. 집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집마다 조금 다르지만 허용하는 집이 많다. 만약 집에 발콘이 있다면 거기서는 무조건 피워도 된다. 그러니까 집 주인의 선호에 따른 것이지, 이웃이 층간 흡연 피해를 호소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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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여긴 아직 전부 다 연초를 태운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친구들 중 드물게 있는 흡연자들도 전자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베를린에서는 전자담배 피우는 사람을 거의 못 본 것 같다.
이러한 차이에 관한 나의 해석은, 독일은 좀 미련한 데가 있어서 연초를 피운다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그것이 여전히 '기능'하기만 한다면, 원형적인 형태로 그냥 사용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낭만적이라서가 아니라 약간 미련해서가 아닐까. (도어락 대신 열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사용하는 것이 약간 더 불편하더라도 여전히 기능하니까..)
알파카는 서울에서 내 주변에서 거의 유일하게 연초를 피우는 친구였다. 그가 무척 한정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태우는 모습은 나한테 굉장히 올드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아직도 연초 피우는 사람이 있어?’ 이런 느낌. 굉장히 파괴적이면서도 또 뭔가 본질적인..?
“독일은 아직 연초의 낭만이 남아 있구나.”
알파카가 말했다.
따라서 낭만은 미련함과 관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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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본 새로운 장면은 담배를 직접 말아서 피우는 것이다. 친구들이 다 같이 바리바리 담배 마는 재료를 가지고 다닌다.
담배 마는 법: 친구 샘에게 배운 바에 의하면, 일단 필터를 입에 물고 종이에 담뱃잎을 올리고 종이 끝부분에 혀로 침을 발라서 돌돌 말면 완성.
이렇게 귀찮게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일단 베를린에서는 담배가 서울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또 샘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담배가 논-비건이고, 또 플라스틱 필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에도 나쁘기 때문에 담배를 직접 만다.
좀 더 원초적인 재료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의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는 점에서 비거니즘적인 행위인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은 실제 담배의 재료를 비건, 생분해성으로 선택하는 데 용이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있다는 개인적 신호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게 뭐야?"
"나는 요리하는 일을 멈추는 것 같아."
샘은 그럴 때 담배를 말아 피우지 않고, 시판 담배를 사서 피우게 된다고 했다.
몸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몸을 돌보기 위해 많은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산다.
그런데 가끔은 그냥 생존하는 것만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때 몇몇 돌봄은 사치가 되고, 그것들은 빠르게 포기된다.
"담배를 사서 피우는 게 더 몸에 나빠?"
"응."
"집밥이랑 인스턴트 같은 차이인 건가?"
"집밥은 너무 좋잖아. 집밥이면 안 피우는 사람도 다 피워야지."
"아, 그러네. 그럼 뭐지?!"
"컵라면이랑 봉지라면 정도의 차이인가?"
대학생 때 단편영화에서 흡연자 역할을 해본 적이 있다. “담배 한 대 피우실래요?” 라는 대사가 있었다. 이 대사를 연기하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세 명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 중 한 명이 나였다. 그것이 내가 흡연자가 되는 데 필연적으로 실패한 이유이다. 소셜하게도 피우지 않는다.
대신 소셜하게 '간접 흡연'을 한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나는 흡연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목격하는 일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지루해하고 흥미 없어 하는 알파카가 흡연구역을 열심히 찾고, 하필 일요일에 담배가 다 떨어져서 문을 연 키오스크를 찾아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간다는 게 이상하고 재밌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친구들이 아프지 않고 함께 무사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말리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좋아해서는 안 되는 모습인지도 모르겠지만.
애연가 친구들에 대한 내 마음은 좀 복잡하다.
친구들이 사랑할만한 게 뭐라도 세상에 있었으면 좋겠다.
"흡연자세요?"
"아니요, 저는 간접흡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