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핑크
요나Jona라는 친구가 생겼다.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친구인데 탄뎀(언어 교환) 파트너로 만났다.
요나의 신기한 점은 그의 모든 것이 분홍색이라는 점이다.
머리카락, 타투, 모자, 코트, 양말, 신발... 리터럴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핑크였다.
‘한국외대’ 에코백을 들고 있었는데, 본래 흰색이었을 이 가방 역시 핑크색. 나중에 물어봤더니 흰색 물건을 사면 일단 세탁기에 염색약과 함께 돌려서 핑크로 만든다고 했다. 핸드폰 화면을 어떻게 조정한 건지 분홍색이고, 심지어 피우는 연초마저 핑크색이었다. (어렵게 찾은 제품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핑크여야 돼요."
요나는 자신의 한국어 문장을 불확실해하는 투로 약간 말끝을 올렸다.
전달이 된 건지 확인하는 표정의 요나를 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나는 요나가 이국의 언어로 자신의 일부를 설명하는 데 정확히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핑크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에 요나는 기호가 아닌 소요의 차원에서 대답한다.
요나에게는 핑크가 더 이상 특별한 색이 아니고 흰색이나 검정 같은 무채색인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핑크가 중립적인 색이라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템펠호퍼 펠트Tempelhofer Feld를 산책했다.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공원'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민둥공원을 끝에서 끝까지 걸으며 엄청나게 멋진 분홍색 노을을 봤다.
그러다 멈춰서 내가 쓴 시를 보여주었다.
한국어로 쓴 시였다.
나의 모국어를 요나가 소리내어 읽는다.
"독일인들은 이를 읽지 못하며, 따라서 안전한 공간이 형성된다."
하필 그런 구절이 있는 시였다. 그걸 독일인이 읽으니까 이상했다.
요나는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 나의 모국어를 들켜버리는 친구. 예외적인 존재가 발생한 것.
그런데도 나는 요나에게 안전함을 느꼈다. 탄뎀 파트너를 가장해 데이팅 상대를 구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사실 처음엔 좀 경계심이 들었었다. (이 경우가 왜 문제냐면 상대가 아시안 여성을 만나고 싶은 옐로피버일 확률이 좀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어쩐지 함께 안심했다.
"요나 만나서 너무 좋아요!"
"맞아요. 우리가 우리라서 다행이에요!"
한 번은 내가 시 번역에 관해 요나에게 물었다.
내가 쓴 시의 등장인물이 논바이너리라서 they라고 번역했는데, 한 명인데 they are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아? 혹시 they is라고 해도 되나? 아니 안 이상해!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나가 "나도 논바이너리야." 라고 말했다.
그런데 딱히 나도 요나를 남자나 여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말하자면 요나는, 그냥 요나였다.
성경에 나오는 요나가 여성이기 때문에 요나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최소한 남성으로 정체화하지는 않을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요나는 원래 이름도 요나야?"
"아니 원래는 요나스Jonas였는데 독일에서 남자 이름이라 내가 바꿨어."
요나는 키가 엄청 크다. 190cm은 될 것 같은데..
한 번은 같이 크리스마스 마켓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요나에게 "프라우Frau"(독일어에서 여성 호칭)라고 칭하는 것을 들었다. 요나는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는 눈치였다.
분홍색을 많이 입었다는 이유로 쉽게 '여성'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 재미 있었다.
핑크가 낯선 이로 하여금 그의 지정성별을 지워버리는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한 걸까?
그랬다면 아마도 핑크가 가장 젠더화된gendered 색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나에게는 무채색과도 같은 중립적인 색이지만.
언젠가 요나가 분홍을 그만두는 날도 올까?
자신의 몸과 물건들을 분홍으로 만드는 일이 지겹거나 귀찮아지는 날이 올까?
문득 아무 표정 없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