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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하늘 Sep 13. 2023

#2. 베억하인 Berghain

베를린의 블랙



베를린을 상징하는 컬러가 있다면 무슨 색일까?

예전에는 노란색을 떠올렸는데 베를린에 오고 얼마 안 돼 곧 검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원색 아이템을 즐겨 착용하는 나를 보고 챠이는 “베를린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컬러가 많다.”고 할 정도로 베를리너들은 블랙을 많이 입는 것으로 캐릭터화 되어 있는 것 같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 중 하나일 베를린의 베억하인Berghain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검정색'을 빼놓을 수 없다.


일론 머스크를 밴 먹이고(?) 모델들도 못 들어간다는 베억하인. 일단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데 입장 기준을 알 수 없기로 악명 높다. 온라인상에는 그런 베억하인에 통과하기 위한 근거 없는 팁이 난무한다.


그러나 ‘올-블랙’을 입어야 한다는 소문 만큼은 가장 지지를 얻은 채 퍼져 있는 것 같다.


구글에 공유되고 있는 베억하인과 관련한 팁


나는 사실 클러빙을 즐기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베를린에 지내는 동안 어쩌다보니 베억하인에 관한 팁들을 주워듣게 됐다.


어학원 같은 반에 베억하인 프리패스상인 안나Anna라는 친구가 있었다.

안나는 DJ가 되기 위해서 조지아에서 왔고 주말마다 클럽에 간다고 했다.


“바운서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라고 말하면서 안나는 '세상의 모든 희망을 잃은 표정'을 연기했다.

베억하인에 들어가기 위해 문지기 앞에서 행복해 보이지 말라는 황당한 팁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친구는 "나도 베억하인 갈 땐 더 게이처럼 하고 가"하고 말했다.

베억하인은 ‘스트레잇-프렌들리’한 클럽이다. 원래는 게이 클럽이었으나 현재는 모든 성별과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오픈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도 너무 시스젠더 헤테로 그룹처럼 보이면 입장이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고 본인이 스트레잇이면서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게 정치적으로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본인이 퀴어임에도 베억하인 입장을 위해 더 '퀴어하게'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들이 일종의 농담처럼 떠도는 것이다.  

(친구 챠이와 ‘퀴어-프렌들리’라는 말의 이상함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결국 퀴어를 중심이 아닌 타자의 영역에 남겨둘 때에 ‘프렌들리’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 ‘스트레잇-프렌들리’라는 말이 어색한 것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을 위해 2, 3, 4가 요구된다.













그 즈음 베를린 클럽 씬에 환상을 품은 친구 알파카가 놀러왔다.

주말이 되자 그는 베억하인으로 향하는 검은 행렬에 합류했다.


이후 알파카는 이런 책을 기획하게 된다.

책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베억하인 입장 거부 당한 남자>이다.


“내가 그날 입고 간 옷이나 헤어스타일 이런 걸 매번 사진으로 기록하는 거야. 그날의 날씨나 기분 같은 것도 기록하고.”


그럼 적어도 실패한 데이터가 쌓이니까 사람들은 그걸 피하면 되겠지.

실제 알파카가 입장 거부 당한 횟수는 2회이다. 그런데 성향이 좀 극단적인 편이어서 그런지 머릿속에서는 이미 172회정도 당한 것 같았다.


“그러다 통과되면?”

“좋은 거지.”

“계속 통과 안 되면 그건 책을 위한 거니까?”

“좋은 거지.”

...

“천잰데?”



알파카는 그 대화 이후에 다시는 베억하인에 줄을 서지 않았다.






몇 달 후 다시 알파카가 베를린에 왔고, 나는 갑자기 그와 함께 베억하인에 가보고 싶어졌다.

알파카는 이 때에는 흥미를 잃은 상태였지만 마침 알파카가 거주하던 집이 베억하인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가보라는 2번 팁을 실행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챠이가 일요일 아침 6-7시에 가면 줄이 거의 없다고 말했을 때,

‘줄이 거의 없다’는 표현이 조금 걸리긴 했다.

그 시간에 줄 같은 걸 서는 사람들이 있을리가 없잖아…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오전 7시가 좀 넘어서 클럽 입구에 도착했다.


모퉁이를 돌자 검정색 옷을 입은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2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올-블랙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뒤를 돌아 아침을 먹으러 갔다.







어느 날의 ECHNO와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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