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뷔페로 차려진 저녁을 먹고 사회를 맡은 선생님의 재치와 참석자들의 호응 속에 2부 순서가 시작되었다. 미리 상품으로 건넬 물건들을 기증받기도 해서 욕심이 날 만한 상품도 있었다. 사회를 맡은 선생님은 참석자들에게 상품을 건넬 때마다 과제를 주셨다! 드디어 내가 선물을 고를 차례가 되었고 나는 두 개의 과제 중에 <노래 부르기>를 택했다. 선생님들께 나눔의 집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말을 한 후에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1절을 끝까지 불렀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솟아났는지!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신기한 듯 물었다. “당신, 무슨 용기로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어? “
내가 스스로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던 말이 꽤나 놀랍고 신기했었나 보다.
위로 오빠 넷에 막내딸로 태어나 목소리 크고 고집도 세고 주장도 강했던 엄마의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나는 살면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감정을 앞세워 있는 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 결심뒤에는 ’ 세상에서 제일 못나고 형편없는 사람은 소중한 가족에게 큰 소리로 화내는 사람‘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다. 아! 돌아보니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에게 단 한 번도 회초리를 드신일도, 큰 소리를 내신 일 조차 없다. 큰소리로 야단치는 일은 엄마담당이었다.
결혼을 결심하고 시댁에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갔던 날, 아버님은 음료수를 빨리 내오지 않는다고 부엌을 향해 어머님께 큰소리를 내셨고 나는 태어나 처음 들어 본 큰소리에 놀라 가슴이 뛰었다. 아! 그때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한 말투로 아버님께 “예예, 곧 나갑니다! “라고 대꾸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남편도 아버님을 닮아 목소리가 끔찍하리만큼 크다. 고등학교 때 정치가를 꿈꾸며 웅변반 활동을 했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아버님을 처음 뵙던 날 진실을 깨달았다. 아! ’ 유전이었구나!‘
그 못된 유전 덕분에 예배 때 설교를 하다가 본인이 중요하다고 여긴 부분에서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다. 그런 날엔 주일 저녁때 조심스레 큰 목소리를 낸 것에 대해 말을 한다. 남편은 내 말 끝에 “중요한 내용이라 강조하다 보니 큰소리를 내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쿨하게 받아들이는 날도 있고”그럼 당신이 한번 좀 해보셔! “라고 슬쩍 언짢은 티를 낼 때도 있다.
이제 교회 안에서 사모로서, 아내로서의 내 역할도 남편의 은퇴와 함께 끝을 맺는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던 날들이었다! 사모로 사는 동안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이 모두 감사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라고 말 하면 특기가 “남의 정곡 찌르기”인 딸이 금세 내게 할 말을 잘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