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엘리온 Jul 10. 2024

흩날리는 말조각들

“보호실에서 지낼 때 불편하거나 힘든 점은 없으셨어요?”

“보호실 생활이 힘들기는 하죠.  하지만 인생에는 고난도 필요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이, 내가 어릴 때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요. 보통 아이들이 그렇잖아요.  그러고 보면 학교 선생님들도 대단하신 거죠.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신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내더라고요.  제 엄청난 수학적 사고력이 기도하면서 생긴 건데, 그때부터 생각이 멈추지를 않아요.  이 세상을 다시 재건해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어요. 노아의 방주와 똑같은 배를 만들어야 해요……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K님이 보호실에 가 계신 동안 힘든 점이 없었는지 물었었어요.  K님은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시려고 고난을 언급하셨고요.”

“아! 맞다!  그렇죠.  음…… 그러니까 보호실에 가게 되면 TV도 볼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TV 만드는 기술이 엄청 뛰어나거든요.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TV에 나오는 건데, 한 번씩 TV가 내 생각을 읽어내는 경우들이 있어서 당황스러워요.  어쩌다가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내 수학적 능력이 TV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건물을 짓는데도 필요해요.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타워 지을 때 귀찮을 정도로 연락이 왔었죠…….”     


끝내 나는 보호실 사용의 힘겨움에 대해서 듣지 못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저만치 달려가는 K의 생각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나름 전력 질주를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도대체 저런 사람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시간씩이나 해요?”

“왜요~?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과장을 좀 섞자면 오늘만 해도 50가지 정도의 주제는 나온 것 같은데요?!  그걸 하나씩 풀어가려면 최소 50번 이상은 만나야 될 것 같아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한 주제씩 다루어 나가는 일이 녹록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50회의 상담을 한다면 한 회에 한 가지 주제가 아니라, 50가지의 주제를 50번 반복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되지도 않는 말 그만해!”

수없이 들었을 이 말을 또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입을 닫게 만드는 반응을 겪으며 깊이깊이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갔을 K였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몰린 은둔자는 아무도 모르게 소멸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상한 말을 할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를 내려놓으면 K의 마음이 보인다.  보호실 생활이 힘겨웠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끝내 듣지 못하겠지만 ‘엄청난 수학능력’이라는 표현으로 덮은 자신의 무가치감에 대한 역설이 엿보인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도 우리는 마주 앉았다.  여느 날에는 보이지 않던 심각한 표정의 K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회해요……  그날 밤을 후회해요.”

“그날 밤이요?”

“예.  사건이 있던 날이요.  할아버지의 목을 조르던…….”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동문서답이 아니어서 놀랐고, 내용의 무거움에 다시 한번 놀랐다.  범죄 사건과 관련된 주제는 이야기를 듣는 나도,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도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질 때 화두에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어요?”

갑작스러운 심경고백에 염려를 담아 물었다.  살인 장면을 떠올려야 해서일까?  대답을 대신하는 그의 미소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달콤한 믹스커피 향이 오래된 시멘트벽의 눅진한 곰팡이 냄새와 어우러지며 교도소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K의 다음 반응을 예측할 수 없어 나는 조금 긴장했다.  말의 내용에 따라서 행동도 덩달아 어떻게 튈지 몰랐다.  K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도 그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분주했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후회하며 갑자기 자해라도 하면 어쩌지?’, ‘큰 소리로 엉엉 울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차분하지만 밤에 잠 못 이루고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을 때 K가 불쑥 대답을 내놓았다.  평소처럼 엉뚱하지 않았고 내 질문에 아주 적합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답변에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럼요. 그 이야기가 너무 하고 싶었는걸요.  드디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았어요.”

‘아아…….’

그 장면을 품고 있기가 버거웠을 시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작 물어봐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어쩌면 나도 K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K의 이야기를 정성껏 듣는다고 나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K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이미 K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할아버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셨었어요.  집에 손님이 오는 경우가 없었는데……  무서워서 방 안에서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는데…….”

K의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정적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려고 할 때, 차갑게 식은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K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거실에 나갔었어요.  어른들이 계시니 인사를 하려고 입을 뗐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 같은 놈 말은 들을 게 없다고……  어쩌면 그때 왔던 할아버지 친구들은 내 생각을 빼내려고 정부에서 파견한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 입을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또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평소에도 할아버지는 내가 말하는 걸 싫어했거든요.”

쓸쓸한 K의 눈빛을 보며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중학생 시절의 한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단짝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늘 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의 집을 오갔고 가족 모두가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었지만 항상 외출 중이었으므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 우리가 첫 대면을 하게 된 것은 친구 집이 아닌 어느 작은 교회였다.  수화를 배워보자는 친구의 제안에 따라서 간 그곳은 농아인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였고 친구의 언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언니와 10년을 넘게 살았음에도 수어를 하지 못한다며 멋쩍어하던 친구가 ‘이제는 언니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함께 하는 사이였으므로 그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등록한 초급반 과정의 첫 시간 수업 내용은 자기소개였다.  이름 석 자를 쓰기 위해 수십 획의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표현해 내야 하는 지화라는 것은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것이 서툰 나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화를 모른다고 한 친구는 언니와 함께 산 세월의 덕이었는지 옹알이 수준의 나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화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이 좋았는데, 내 즐거움의 진짜 이유는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에 있지 않았다.

시선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의 미모를 소유한 친구의 언니는 미소마저 너무 예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의 곁에는 남자친구가 항상 함께였는데 그분 역시 농아였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연인은 서로의 감정을 읽고 입술 모양을 읽기 위해 흡족히 바라봐 주었고,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표정은 매우 풍부했다.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도 현란한 손놀림을 다 읽어내는 것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그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수화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그리고 가만히 듣겠습니다.’

서로에게 시선이 향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그들의 소통 방식은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소통 방식보다 더 큰 애정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K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까?

들어주는 이가 없어 허공에 흩어져버린 K의 숱한 말 조각들은 결국 상처가 되어 그의 입을 닫아 버리게 만들었다.  농아인의 소통 방식처럼 K에게 시선을 두고 K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이고 K의 손짓 하나까지 신경 쓰며 귀 기울여 주는 단 한 사람이 절실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번잡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나는 내 눈앞의 현실을 바라봤다.  어쨌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자리는 죄인을 가두어 두는 감옥이었다. 

정신질환의 발병 ⟷ 주변의 한숨과 무시 ⟷ 사회적 고립…….  그리고 이 순환의 어느 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는 범죄.  아울러 이 순환의 어느 자리를 반드시 차지했어야 할 적절한 치료.

조현병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좋은 치료라고 믿는다.  어느 정신장애자의 말을 빌리자면 ‘내 옆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다.  당사자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나는 필담을 나누듯 그의 언어를 눈으로 새겼다.  ‘들어주기’는 정신질환의 발병 ⟷ 주변의 한숨과 무시 ⟷ 사회적 고립……의 징글징글한 연결고리에서 ‘사회적 고립’의 시간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동문서답과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의 비행만 쏟아지는 지난한 상담이 되더라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생각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전력 질주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세상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것이 된다.  맥락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끝에서도 절대 잊지 않던 K의 감사 인사는 더 이상 은둔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였을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하모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