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슬픈 음악 또는 슬픈 내용의 영상이나 문학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해소 및 치유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전에도 나는 괴로운 마음이 드는 때면 슬프거나 극적인 음악을 들으며 나 홀로 나름의 카타르시스(Catharsis) 의식을 치르곤 했는데, 책에서 그 사실을 접한 후로는 그러한 나의 의식행위를 조금 더 당당하게(?), 뭐랄까 마치 누군가에게 정식 승인을 받은 프로젝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의식적으로, 위풍당당하게(?) 치르게 되었다.
나의 그러한 당당한 카타르시스 프로젝트 의식에 종종 등장하는 음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주제곡이다. 발레 <백조의 호수> 안에는 매우 다양한 여러 음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제곡(Swan Theme), 발레를 보지 않는 이들조차도 모두 다 알고 있는 그 곡을 가장 애용하곤 한다. 그 곡을 들으면 오데트의 처연함, 슬픔, 긴장, 들뜸, 떨림, 사랑, 좌절감, 배신감, 체념 등 모든 감정이 파노라마처럼 전해지는 것 같다. 지그프리트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배신과 좌절을 겪어야만 했던 오데트.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좌절에 빠지는 또 다른 한 사람 지그프리트.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닌, 마법처럼 환상적이면서도 슬프고 어두운 비극적 아름다움이 드리워져 있는 발레 <백조의 호수>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때마침 이러저러한 일로 마음이 조금 심란한 듯한 때에 운 좋게도(?) 발레 <백조의 호수>를 관람하게 되었다. 올해 관람하는 <백조의 호수>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이었으며, 반주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맡았다. 나는 주로 국립발레단의 공연을 보는 편이라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은 매우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의 유니버설발레단 공연이어서인지 괜히 더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도 아닌 <백조의 호수>인데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떨림을 선사했다.
내가 관람한 회차에서는 전여진 발레리나가 오데트(Odette) 및 오딜(Odile)을, 이동탁 발레리노가 지그프리트(Siegfried)를, 조은수 발레리노는 제스터(Jester), 드미트리 디아츠코프는 로트바르트(Rothbart)를 연기하였다.
이번 회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무용수는 단연 여진리나와 은수리노였고, 특히 여진리나는 오데트 역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오데트의 느낌을 너무나도 잘 살려 춤추었다. 백조의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날갯짓과 곡선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낸 춤이었다. 혹시 어디 호숫가에서 백조들이랑 살다 오셨나 싶을 정도로 백조 인간 그 자체였다. 춤선이며 테크닉이며 어느 하나 아쉬운 부분이 없었고, 연기마저 정말 좋았다. 여진 오데트가 너무 좋아서인지 상대적으로 여진 오딜에게선 강렬한 팜므파탈이 느껴지지 않아 약간 아쉬웠지만 그만큼 오데트 역할이 너무나도 찰떡이었던 것이리라.
동탁 왕자는 사소한 실수들이 조금 보였고 춤선이 다소 무겁게 느껴져서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웠다. 연기는 정말 좋았다.
로트바르트의 경우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고, 은수 제스터는 정말 익살맞고 재미있는 재간둥이 어릿광대였다. 춤, 연기 모두 좋았고, 왕자보다 훨씬 많은 시선을 두었을 정도로 매력적인 제스터였다.
더욱이, 이번 공연에서는 아름다운 군무 장면들이 정말 기억에 남았다. 사람이 아니라 정말 백조들을 데려다 놓은 것처럼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군무였다. 무대 연출도 정말 좋았고, 오케스트라 연주도 탄탄하게 잘 받쳐 주어서 전반적으로 훌륭하고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보았던 최근의 국립발레단 공연은 <카멜리아 레이디>였는데 그 공연에 워낙 실망을 했던지라 이번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가 더욱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번 공연은 앞으로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찾아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조의 호수>는 같은 내용임에도 볼 때마다 느끼는 바가 참 다른데, 올해에 본 <백조의 호수>에서는 오데트가 느꼈을 배신감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면약하기 그지없음이 크게 다가왔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에 차이코프스키는 어떠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이토록 섬세하고도 극적인 음악을 빚어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세간의 추측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하니, 그의 그러한 고뇌가 이러한 비극적인 사랑의 음악을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하여 본다. 그가 이 음악을 작곡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치유했기를 바란다. 그의 음악이 나의 슬픔을 치유해 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