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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모던발레 좋아했네. 국립발레단 <인어공주>

by Daria


국립발레단을 통한 웬만한 발레 작품들은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완전히 생소한 작품 하나가 있었으니 <인어공주>이다. 국립발레단의 발레 <인어공주>는 2024년인 작년에 초연되었다고 하며, 2025년인 올해로써 두 번째 공연이 되겠다. 국내 초연도 지극히 최근에 이뤄졌지만 이 작품의 세계 초연 또한 비교적 최근에 이뤄졌다. 짧게나마 잠시 짚고 넘어가 보자면, 발레 <인어공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 안무가 John Neumeier(존 노이마이어; 1939~)에 의해 창작된 모던발레이고, 해당 작품의 음악은 작곡가 Lera Auerbach(레라 아우어바흐)가 도맡았으며, 함부르크 발레단의 공연을 통해 2005년 독일에서 세계 초연이 이뤄졌다고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바탕으로 재창조된 이 작품은 모던발레이자 드라마발레로 분류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뚜렷하게 클래식발레를 더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 작품을 본 뒤로 그 생각이 깨졌다. 오늘 나의 정신상태가 작품 속에 담긴 철학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작품 자체가 뛰어나게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발레 <인어공주> 첫 감상을 통해 모던발레의 참 매력을 느끼게 됐다.


가장 먼저 해당 공연에서 인상 깊었던 점으로 음악과 안무를 이야기하고 싶다. 몽환적이면서도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극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로테스크 장르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그야말로 제대로 저격한 작품이었다. 물결치듯 일렁이는 안무는 물론이고, 인물의 심리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안무까지 모두 인상적이었고, 이에 걸맞은 음악이 함께 어우러져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또한, 무대연출 또한 작품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었는데, 군더더기 없이 매우 적절한 무대장치와 디자인 덕분에 극에 더욱더 몰입할 수 있었다. 바닷물의 고저를 표현한 연출도, 푸른색의 몽환적인 색감도 참 좋았다.


이번 회차에서 인어공주 역을 맡은 발레리나 김별은 인어공주의 어리숙하고도 갑갑한 캐릭터를 매우 잘 연기해 주어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몰입하여 속으로 “얘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라고 외치도록 만들었다. 왕자에게 피앙세가 있는데도(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왕자는 본인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도) 저렇게 끈질기게 사랑을 갈구하는 걸 보면 솔직히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순진한 인어가 첫사랑에 단단히 빠져버린 건 알겠다만, 저런 놈이 뭐라고(멋있긴 하지 사실) 저렇게 매달리는지 원. 도의적으로 그의 피앙세에게도 못할 짓이고. 솔직히 왕자가 인어공주 본인을 처음 보았을 때 첫눈에 사로잡지 못했다면 구애의 골든타임(?)은 놓친 거라고 봐야 한다. 이미 바다마녀와 거래를 한 터라 더더욱 왕자의 사랑에 집착하는 걸 테지…. 무작정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아무런 전략도 없이 냅다 저지르고 보면 어떡하니.

답답한 인어공주를 보면서 얼마 전 책에서 읽은 늑대인간 <비스클라브레>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추방된 자처럼 소외되어 사는 늑대인간처럼, 인어공주 또한 바다와 육지 그 어느 곳에도 분명하게 속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처지로 지내다가 사랑은 이루지도 못한 채 정체성 혼란과 소외감, 외로움, 사랑의 허망함 속에서 괴로워하며 끝이 난다. 표면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어공주의 짝사랑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 매우 다양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어서 작품을 감상하며 생각하는 재미가 있었다.


김별 발레리나의 연기 덕분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고, 이재우 발레리노의 훤칠한 외형은 두 여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서사를 단번에 납득시켜 주었으며, 바다마녀의 힘 있는 춤선과 시인의 섬세한 감정연기 및 완급조절 역시 몹시 인상적이었다. 다만, 어떤 군무 장면들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매우 호연이었고 작품 자체도 수작이어서 아주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금년도 국내에서 관람한 발레 공연 중 이번 <인어공주>가 현재까지는 마음속 1위이다. 일요일 회차로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체력 이슈로 고민 중이다. 어쨌든 좋은 작품을 경험하여서 기분이 참 좋다.



커튼콜



공연을 보고 나오면 항상 세상이 예쁜 색깔로 물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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