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 예정되어 있던 국내 전시들 중에서도 특히 손꼽아 기다려온 김창열 회고전이 드디어 개막하였다.
누가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 아니랄까 봐 그의 전시를 보겠다 나선 날에는 하늘에서도 은빛 구름 사이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으니 온통 물방울로 가득 방울진, 그런 하루가 됐다.
평소 김환기 작가의 전면점화를 탐닉하던 나의 취향은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화에도 여지없이 반응하였는데, 뚜렷이 다른 두 화가의 작품에 어째서인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곤 하여 내심 신기하게 여겼더랬다. 이전까지 김창열 작가의 작품은 단독전보다는 그룹전의 일부로써만 접해왔으나 이번에 대대적으로 기획된 김창열 작가의 단독전을 둘러보니, 그간 어찌하여 서로 다른 두 화가의 작품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숙이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이 역시 이러한 대규모 단독전의 장점이자 가장 큰 매력이다.
화가 김창열(1929-2021)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난세 속에서 가슴에 무수한 생채기를 얻으며 자랐고, 이후 뉴욕과 파리로 건너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넓히고 다지며, 이윽고 '물방울'이라는 최종 여정에 오르게 된다.
작고 후 4년, 사람들에게 '물방울 화가'로 불리며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는 김창열 화백. 이 전시는 내게 그 예술 세계에 흠뻑 빠져볼 수 있는 장을 제공해 주었다.
들어서자마자 돌과 유리로 제작된 조형물이 시선을 잡아 끈다. 전시장 조명을 받은 투명한 유리 방울들은 각도에 따라 각양각색의 빛깔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까만 밤 달빛 아래 빛나는 조약돌과 같이 보이는 것이 왠지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 한 장면을 떠올리도록 하였다.
전시장의 첫 번째 구역에는 <제사>라는 제목을 단 작품들이 많았는데, 처음엔 이 층층이 덧발린 색색의 물감들에게서 색의 의미를 탐구해 보다가, 전시장 한편에 적힌 어느 문구 하나를 보고 난 이후로는 어쩌면 작가가 애도를 담아, 상처를 하나하나 지우는 마음으로 이 물감을 바른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김창열 화백은 뉴욕으로 떠나 그의 예술적 저변을 넓히고자 하였다. 비록 뉴욕에서 그의 작품을 통한 주목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그의 화풍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1969년 파리로 떠나면서 그의 고유한 화풍은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아래의 작품들은 징검다리와도 같았던 그 시기에 쏟아져 나왔던 것들로, 개인적으로는 무척 인상 깊게 보았다. 어딘가에서 꿈틀대듯 나오는 이런저런 형상들이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무언가 꿈틀대도록 만들었다.
한국에서 미국, 미국에서 프랑스로 거쳐가는 동안 그의 예술 또한 무수한 여정을 지나 이윽고 '물방울'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재사용하려던 캔버스 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그 안에서 충만한 형태의 조형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를 계기로 물방울을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고, 이후 평생에 걸쳐 물방울을 탐구하게 된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조형 실험과 깊은 사유 끝에 도달한 예술적 발견이었다. (*전시장 섹션 안내문 인용)
캔버스 위를 빼곡히 메운 다양한 형태의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을 보며 나는 이런저런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이렇게나 넓고, 이렇게나 다양한 존재가 모여 살고 있으며, 나 또한 그 무수히 많은 존재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저마다 다른 모양을 갖고 있음을.... 작가가 그려낸 물방울에 나는 인간을 투영하여 바라보았다.
그의 작품 앞에서 기나긴 사유와 반추의 시간을 보낸 뒤, '회귀' 섹션에 다다랐다. 이 시기에 그는 천자문과 물방울을 결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연작들이야말로 작가의 세계 전반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작가가 받은 영감의 원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다행이라는 기쁨 또한 들었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면 이러한 운문 한 편을 만나볼 수 있다. 많은 작품들을 통하여 얻은 나만의 느낌이나 생각들이 이 시와 겹쳐지며 더욱 깊은 울림이 전해지는 듯하였다.
작품 자체도 무척 좋았지만 큐레이션도 매우 훌륭하여 아주 만족스러운 전시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지리상으로 접근성도 좋고, 전시 관람료 또한 부담이 적으니 누구에게든 이 전시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