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아노의 신, 예핌 브롬프만 리사이틀

by Daria



피아노의 신을 보았노라고 오랜만에 부르짖고 싶은 연주회에 다녀왔다. 그렇게나 많은 연주회를 다니지만서도 그중에서 찬미할 만큼 환상적인 경험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실로 오랜만에 피아노의 신을 영접하였으니, Yefim Bronfman(예핌 브롬프만)의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브롬프만 선생은 내게 난생처음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연주자로서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왔다. 하지만 워낙 전설적인 리코딩을 남기고 떠난 연주자들이 많다 보니 그 후로 브롬프만 음반을 자주 찾아 듣지는 않았는데, 이번 리사이틀에서의 연주를 듣곤 “신이시여. 그간 당신을 찾지 않았던 저는 참으로 몽매하기 짝이 없었군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브롬프만 선생은 이번 연주회에서 슈만, 드뷔시, 브람스, 프로코피예프를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는데, 곡 하나하나 영롱하고 맛깔나니 곡이 바뀔 때마다 각각 다른 차원의 환상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오는 듯하였다. 짧지만 정갈하고도 진중하게 흘러간 슈만 아라베스크로 공연 시작부터 청중의 집중력을 한데 모았고, 이어진 브람스의 피아노소나타는 약간 빠른 듯 하긴 했지만 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살렸으며, 때로는 강렬하게 음을 쏟다가도 어느 구간에서는 몹시도 담담하고 부드럽게 감정을 조절하며 그야말로 고도로 브람스스러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브람스도 무덤 속에서 흐뭇하게 듣고 있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 볼 만한 그런 연주였다.

2부의 드뷔시 영상은 할아버지가 가만히 들려주는 bedtime story와 같았고, 이어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소나타는 앞선 곡들을 잊을 만큼 파격적이고 매혹적인 연주였다. 내가 알던 프코 피아노소나타 7번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새롭고도 긍정적인 인상을 남겨주었던 한편,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이 곡에서 같은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본 공연 후에 연주해 준 앙코르 곡들도 어쩜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또 한 번 황홀함에 젖은 채로 공연의 감동을 사뿐사뿐 정리할 수 있었고, 실로 오랜만에 피아노의 신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연주회장을 나섰다.


연주자의 사인회가 예정되어 있어서 로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기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다행히(?) 사인받는 것에 큰 흥미가 없는 나는 브롬프만 선생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한껏 더 감동에 취한 뒤 공연장을 떠났다.


매우 수준 높고 경탄스러운 연주를 들어서 참으로 기분 좋은 하루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공연이 끝난 뒤의 청명한 가을 밤. 참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청명한 여름 저녁, 얀 리시에츠키 리사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