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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Mar 26. 2024

멍  때리기

                  그림 이해경作ㅡ사랑 그리고 그리움


「불멍」, 「물멍」

TV를 틀면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자주 하는 말이다.

요즈음은 하도 인터넷 신조어나 축약하는 단어들이 많아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야외에서 모닥불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은 「불멍」, 바다나 흐르는 강을 멍하니 보는 것을 「물멍」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옛날 같으면 ‘멍청히 앉아있다’ 고 다분히 못마땅하게 했을 말인데 지금은 자연스러운 유행어가 돼 버린 것이다. 게다가 '멍하다'라는 표준어가 있지만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속어를 사용해 ‘멍 때리기’라고 표현한다.


 바쁜 현대인들이 잠시 멍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기사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 끊임없이 우리 몸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의 뇌도 쉴 틈이 없기 때문에 가끔 뇌에게도 휴식을 주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사는 현대인들에게 멍 때리는 시간은 몸도 마음도 쉬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멍 때리기를 나는 진작 실천했다. 아니 실천한 것이 아니라 강제 실천 당한 것이다. 지방에서 교편을 잡으시던 아버지는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오셔서 일요일 오후에 학교로 돌아가신다. 이 일박이일 동안 우리 형제들은 엄한 아버지와 같이 꼼짝없이 식사를 해야 했다. 문제는 식사 후이다.

아버지는 식사 후 10분 정도는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심지어 책도 못 보게 하니 소화를 시키라는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감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그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수십 년 전이니 그때 아버지가 멍 때리는 시간의 유익을 알 리가 없으셨겠지만 알았더라도 그 의미를 모르는 초등학생인 나는 고역이었던 기억이다.


멍청하니 뭘 바라보는 것이 뭐가 유익이 있겠냐고 무시하던 중 그 효과를 실감한 일이 있다. 수년 전 심한 두드러기로 응급실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다녀오고도 가려움증으로 정신집중이 되지 않아 괴로울 때 우연히 집에 있는 양초가 눈에 띄었다. 온 집의 불을 끄고 양초를 켜놓고 가만히 불꽃을 보고 있으니 놀랍게도 마음이 진정이 된다.

아하! 이것이 ‘불멍’의 효과인가 싶었다.


 얼마 전 밤 12시가 넘도록 TV를 보고 있으니 생소한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제목은 ‘가만히 10분’

10분 동안 화면은 어느 한 동작만을 계속 보여준다. 내가 본 날은 나무숟가락을 파내는 작업이었는데 10분 동안 그 장면만 보여주고 사람도 대화도 일절 나오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조각칼로 나무를 파내는 ‘사각사각’ 소리뿐이다. 제작진들도 요즈음은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심리를 잘 파악하여 그에 맞는 프로그램을 아예 편성한 것이다.  조용한 밤 시간에 잘 편성되었다는 생각에 자기 전 보려고 하나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하는 방송이라 그전에 잠자리에 들면 굳이 그 시간을 기다려서 보기는 쉽지 않다.

나만의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가 넘어 방송하는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늘 소파에 앉아 바라보는 맞은편 벽에 편안한 그림 한 점을 걸어놓고 바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몇 개 있는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위의 그림이다.

푸른 풀밭에 파란색 달개비꽃들이 피어있고 옆에 놓인 수틀에 황금색 꽃이 수놓아져 있다. 보고 있으면 이야기가 그려진다. 예쁜 소녀가 푸른 풀밭에서 수를 놓다가 친구가 와서 잠시 다른 곳으로 놀러 갔나 보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곧 돌아오겠지? 곱게 깎인 푸른 풀을 볼 때마다 마음을 편하게 한다. ‘풀멍’이라고 해야 하나?

 멍 때리는 시간이 아직은 완전히 생각을 비울 수는 없다. 이것도 훈련이 되어야 하겠지만 ‘불멍’, ‘물멍’이 아니더라도 눈과 마음이 편한 그림을 10분 정도 바라보는 것도 바쁜 하루의 일상에서 몸과 뇌가 쉼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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