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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25.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좋다가 몸이 힘들다가, 좋다가 마음이 힘들다가, 다시 좋다가

오늘은 동생 생일, 내일은 내 생일. 그저께부터 어제, 오늘 세 번이나 동생에게 생일 인사를 했다. 처음은 이사한 누나집에서 만나서 육성으로 축하한다고, 어제는 갠톡으로, 오늘은 가족단톡으로 전했다. 그동안 오랫동안 해주지 못한 살가운 말들을 해주고 싶었나.


'못난 오라비를 용서해 줘서 고맙구나.'


그리고 동생에게 내 이야기 같다고 느꼈던 책을 선물로 줬다. 주인공에게 나만큼 몰입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좋은 이야기이다. 또 홈파티까진 아니어도 구색을 좀 갖춰주고 싶어서 장도 많이 봤다. 맛있다며 잘 먹는 게 오빠 생각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뻔한 말이 기분 좋은 법인가 보다. 서로 와인 한 병씩 사온 걸 볼 때는 살짝 애틋도 했다. 어릴 적 읽었던 오헨리의 <크리스마스선물> 이 떠오르는 건 주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로 없는 살림에 기특도 하다.


어제는 마라톤을 뛰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그래서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었고 달림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청년들 세 명이 나란히 앞에서 뛰는 걸 뒤따르며 보고 있으니 뒷모습에서 뭔지 모를 비장함이 멋있었다. 나아가는 모습. 조금 아름답기까지 했다.


여의도공원에서 마라톤을 마치고 한강으로 이동해서 점심으로 각자 라면, 김밥, 비빔밥, 도시락 등 다양하게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따뜻함을 넘어서 더워지긴 했지만 '이게 여유구나.' 생각이 들 만큼 한가롭고 좋은 마음에 잡티 하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복이 별거냐, 좋은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거지." 하는 거구나 싶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는 것도 좋았다. 사람들끼리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편하게 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 깊숙이서부터 진한 편안함이 찾아오는 게 느껴졌다. 만족감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갈망하는 것에 그런  종류의 것이 있었구나. 그래서 장난스러운 "님이 뭔데요." 소리를 농담으로 넘기지 못했었나 보다. 나는 가엾게도 천박하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뭔가가 되고 싶어 했나 보다. 사람들도 다 알았겠지.


헤어질 때쯤 얼마 안 가 그 편안한 감정이 반전 돼버렸다. 내 목양견 기질 때문인지 무리에서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발생했을 때 안절부절못해버린 것이다. 이 분, 저분한테 실수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감도가 조금만 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와중에 기숙사 도착해서 자정 전에 스픽(영어 말하기 앱) 불꽃 유지하려고 휴게실에서 10분짜리 한 개 하고 들어가는 내 강박증스러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나름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월요일인 오늘은 10시 반부터 4시 15분까지 연강인 날이다. 아침에 공유주방 위치 확인차 잠깐 발품을 팔고 돌아와서 수업 듣고 4시 반에 유치원 근로를 갔다. 와, 근데 교실 들어갔더니 맨날 선생님들 말도 드릅게 안 듣는 쌍둥이 형제가 웬 일인지 와서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하면서 안아주는데 어젯밤부터 있던 복잡한 마음이 치유가 됐다. 내 자식도 아닌데 이 정도면 아이를 낳아 기 부모님들에게는 가히 "당신은 확실히 가장 순결한 행복을 맛보셨군요."라고 할 만한 거 같다. 


뜻밖의 상황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아야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뭘 자꾸 다 좋게 하려는지. 각자 알아서 해도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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