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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un 23. 2024

히키코모리의 8년 만의 재입학 생활

그리고 맞이한 두 번째 종강 

맙소사. 

불과 시간 지나간 순간은 종강이었다. 해냈구나. 그것도 '무사히', '잘'


요즘 '두 번째'라는 것의 엄청난 힘을 절감하고 있다. 학기도 마찬가지라고 느낀다. 재입학 후 첫 번째 학기보다 이번 학기는 정말 더 잘 해냈다. 나는 8년 반 만에 방구석에서 현실세계로 이세계 환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스타팅 포인트는 제적당했던 대학교인 셈이고. 몸풀기로 첫 학기는 한 개의 비대면 강의, 세 개의 대면 강의로 총 12학점만 수강했다. 그런데도 역시 첫 번째는 시행착오 과정이기 때문이었는지 생활하면서 몸도 많이 다치고 허둥지둥 헤매기도 심각하게 많이 헤맸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내가 조종해야 하는 나의 몸과 나의 정신까지도 낯선 것이었다. 몸은 예전의 운동기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고 병에 취약해졌으며, 정신은 늘 주눅 들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한 학기 해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할만해서(걱정은 언제나 실제 일어날 일보다 과한 것 같다) 이번 학기는 18학점으로 강의 수를 정상범위로 늘렸다. 그리고 운동도 더 규칙적으로 더 자주, 오래 했다. 개인적인 공부도 거의 매일 빠뜨리지 않고 했다. 재입학 후의 두 번째 학기는 팀플을 할 때도 덜 무서웠고, 발표를 할 때도 덜 무서웠다. 캠퍼스를 걸어 다닐 때도 덜 무서웠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덜 무서웠다. 출석을 부를 때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 위해 사서분에게 학번을 들킬 때도 덜 무서웠다. 몇몇 것들은 덜 무섭기보다도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작년에 만난 모든 인연들로부터 조금조금씩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해주신 말들, 나눴던 대화들, 함께 한 시간이나 추억들이 내가 이렇게 살 수 있게 만들어줬다.


1."그 시간이 oo님한테 필요했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어요."

2."왜 oo님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들도 oo님 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 안 하시나요?"

   

 1번은 작년 고립은둔지원사업 선정 면담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었다. 나의 구원이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들었던 비슷한 말로는 고통의 시간을 치유하는 데는 아홉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상쇄시키려면 긍정적인 에너지는 그 세 배의 양이 필요하다가 있다. 같은 맥락인 것 같다. 


 2번은 고립은둔지원사업에서 연계해 준 마음건강 상담의 상담선생님께서 상담 중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볼 거 같아서 두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작년 10월 께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다.) 10년이나 집에서 틀어박혀 산 나를, 사람들이 괴물로 볼 거 같고 쓰레기로 볼 거 같고 인생패배자로 볼 거 같아서 두려웠으니까. 그때 선생님은 만약에 내가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거 같냐고 하길래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힘이 돼주고 싶을 것 같다고 했다. 


"왜 oo님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들도 oo님 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 안 하시나요?"


 대답할 수 없었다. 살짝 어지러워지면서 영혼이 몸보다 약간 뒤쪽으로 이동하고 선생님과의 거리가 방금 전보다 더 멀리 있는 거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주변이 약간 하얗게 보이면서. 선생님은 "당신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선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당신만큼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나, "다른 사람들을 믿어보세요."라는 말 대신에 나 스스로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었다. 상담선생님은 몇 차례의 상담동안 한 번도 가르치는 듯한 태도로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늘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인정해 주셨고 걱정해 주셨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강하게 무언가 일깨워주시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감사하다. 상담사에게 상처를 받았다던 청년들도 더러 계셨는데 정말 훌륭한 분을 만났다고 다시 한번 느낀다.


 상담 선생님께서 깨우쳐주신 이후 나는 사람들을 믿었다. '아, 이 사람들도 나만큼 힘든 삶을 살고 있어. 어쩌면 나보다 더 괴로운 삶을 살았을 거고. 그리고 이 사람들도 그 괴로움 속에서도 선한 것을 지키며 살고 싶어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대했다.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나에게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아직 안 늦었다." 같은 말만 해주었다. 속으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고, 속으로 생각을 할 만큼 내게 관심이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하기로 노력했다.  '불신'이라는 저항력이 줄어드니 사람 간의 흐름이 원활해졌다.

 

 불신은 신뢰보다 어렵고 힘들다. 불신하고 검증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 에너지가 그만큼 투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나를 보고 몇몇은 나에게 "약점이 잡힐 수 있다.", "적을 만들 수 있다." 같은 걱정 어린 말을 해주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동의하고 있다. 불신과 신뢰 사이의 검증에 필요한 노력을 생략했다가 같은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 교회 설립 자금을 날리거나, 점원의 말만 믿고 비싼 전자기기를 사거나 하는 사람을 미워해봤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의 이야기다. 어떤 이해관계가 결부된 문제에서는 다른 태도도 갖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순간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배신자 종자들은 언제나 신뢰 커뮤니티 속에서 크게 한 탕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으니.


 지난 21일에 금요일에 '글쓰기'를 눌러 열린 이 하얀 페이지가 23일 오늘까지 닫히지 못하고 열려있었어서 그런지 처음 시작했던 내용에서 멀어진 것 같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처음이 어렵고 두 번째만 돼도 여유가 생기니, 처음을 쫄지 말고 그냥 일단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배우는 순간의 수치는 필수불가결이다. 부끄러워하면서 배우자. 나는 근 1년간 사람들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기적은 내가 두려워 피해온 것 속에 있다고 하더니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한 나에게 그래도 '그럭저럭 행복한 하루를 산다.'는 기적이 일어났다.  


 주제넘지만 혹시라도 당신이 기적을 찾으신다면 두려움 속으로 걸어가 보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커버 사진은 수잔나가 찍어준 것으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리더십 개발 팀원들과 내가 종강에 대한 소회를 나누고 있는 순간이다. 10살 차이나는 히키코모리 출신 아저씨의 인생을 격려해준 대학생들이 참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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