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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un 29.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휴일

미지라는 베일 벗기기

6.28 금요일

 오랜만의 풀타임 근무에 놀랐던 마음도 두 번째가 되니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퇴근 후 유치원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분식집에서 닭강정을 먹었다. 4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지만 일주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휴식 삼아 마음 편히 기다렸다. 오래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인기없는 식당에 어쩐 일로 7명의 단체 손님과 입장이 겹쳤기 때문이다. 단체 손님 중 두 명 정도가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이었는데 '젊은이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와 그 중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라든지, '젊은이들이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 등 주제였고, 식사가 나오자 다같이 식사 기도를 하는 모습에서 교회 모임이구나 싶었다.

...

 평소처럼 10분 만에 닭강정을 받아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장님이 키우시는 강아지. 몇 번 방문하는 동안 처음 봤다. 이름은 뽀뽀뽀의 '뽀' 자와 이슬의 '슬' 자를 써서 뽀슬이라고 한다.

 저녁으로 닭강정을 먹고 방에 도착해서 쉐프렐라홍콩 분갈이를 했다. 홍콩야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왜 굳이 더 어려운 '쉐프렐라홍콩'이라는 말을 쓰냐면 작년 10월 화분을 받아올 때 함께 꽂혀있던 이름표에 쉐프렐라홍콩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세상에서 해당 식물은 쉐프렐라홍콩으로서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다.    

 월요일에 기지개센터에서 분갈이할 때 쓰라고 흙을 좀 받았었는데 퇴근 후 저녁에는 밥을 먹고 루틴을 하고 독서를 하고 학교 일처리 따위를 하느라 화분 사러가고 분갈이하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화분을 사러 다이소에 왕복 20분을 다시 걸어갔다와야했지만 더 미루기 싫고 금요일 저녁이라는 여유로운 시간에 하고 싶은 마음에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갔다왔다. 잘한 것 같다.


 쉐프렐라홍콩이 벗어놓은 허물을 옆에 같이 뒀다. 혹시 또 쓸 일이 생길까 싶기도 했고, 식물이 많이 커서 저렇게 집을 옮겨간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 옆에 뒀다. 키운지 얼마 안됐을 때 찍어둔 사진을 보니 쉐프렐라홍콩도, 줄무늬아이비도 많이 자랐다. '나도 그만큼이나 자랐을까' 하는 낯간지러운 생각을 해본다.


6.29 토요일

 오늘.

 요즘 방학인데도 보통 6시 전에 깨고 어쩌다 운 좋게 늦잠을 자도 6시 반이다. 햇빛에 방이 밝아지면 깨도록 블라인드를 올려놔서 그런가 싶어서 블라인드도 내리고 자보고 수면 안대도 해봤지만(룸메가 나간 이후로 안대와 귀마개는 하지 않고 있다.) 오늘도 5시 40분 쯤 깬 것 같다. 늘 그렇듯 스트레칭을 하고선 옆으로 몸을 돌려서 일어난다.


 오늘은 산을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 김에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 기숙사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철분바같은 것을 사서 나섰다. 작년에 남산을 갔을 때 정상에서 앞에 보이는 산들의 이름이 표시된 판을 봤다. 그리고 '여기서 보이는 산들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학기 동안 많이 못 가서 마음에 걸렸었다가 드디어 그 한의 일부를 풀었다. 남들에게 평범한 무언가가 나에게 미지의 대상인 것은 싫다. 이 두려움에 관해서도 다음에 써 볼 생각을 하고 있다.


 지하철, 버스를 타고 이동해 8시 쯤 홍지문쪽 인왕산 입구에 도착했다. 인왕산을 오르고 내려와서 윤동주 문학관 바로 앞에 보이는 입구로 북악산을 올랐다. 미지라는 베일 두 개를 한 번에 벗기고 그 안의 실체를 보고, 밟고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두 산이 나트막한데다가 심지어 가깝기까지 하니. 그래서 그런지 인왕산-북악산 코스를 타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인왕산에서 봤던 외국생활을 하다온 사람과 (일행에게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구한 집' 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했었다.) 내키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보아 아빠에게 끌려서 온 것 같은 젊은 형제들을 북악산에서 또 본 것이다. 이 밖에도 건강한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보였다.

인왕산 등산로와, 인왕산에서 본 북악산

 산에 대한 후기를 남기자면, 인왕산이 훨씬 더 산스러웠다. 풀이 많은 구간, 바위 산이 있는 구간같이 전형적인 산의 요소들이 있었다. 반면 북악산은 그냥 자연 속에서 천국의 계단을 타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단이었다. 그런데도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걸 보고 혼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선크림을 잔뜩 발라 희멀건한 땀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서 나무 데크 계단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볼 때에 혼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나를 돌아봤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는 이렇구나. 이기적이구나. 이런 면에서는 사랑이 없구나. 아닌 척 해봐도 이미 다 들켰을 것 같고 앞으로도 숨길 자신이 없으니 등산은 당분간 계속 혼자 다니자.     

처음부터 끝까지 왼쪽 사진의 반복인 북악산, 북악산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악산을 내려와서 그대로 걸어서 이번엔 통인시장으로 이동했다. 맛집 동아리를 하게 된 근본 이유도 이 통인시장 때문이었는데. 올초, 자조모임에서 통인시장 같이 가자고 한 청년과 둘이서 이야기하던 것이 사람들 더 모아서 얼떨결에 동아리가 됐었던 추억. 그 청년이 통인시장이 아닌 광장시장을 가자 하여 통인시장을 못 간 바람에 오늘 가게될 때까지 거의 반 년 걸렸다. 이것까지 오늘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하고 싶었던 일' 중 총 세 가지를 했다. 마음의 찝찝함도 사라지고, 작은 성공으로부터 오는 효능감을 만끽하고 참 좋다.

통인시장으로 이동 중, 길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았다.


 엽전으로 바꾸기 위해 11시를 기다리는 동안 시장 구경을 했다. 현금으로 사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 뭘 먹을지 둘러보다가 다양한 해산물 부각 상점이 있길래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으니 사장님이 시식을 시켜주셨다. 종류별로 다 주시려고 하셔서 그만주셔도 된다고 해도 괜찮다며 손님들 드리는 거라고 하나씩 주셨다. 사장님이 친절하시고 무엇보다 맛이 괜찮았다. 근처 식당들에 납품도 하신다 그러시고 안주로도 좋다고 하셨는데 충분히 납득이 됐다. 나도 사가서 밥 반찬으로 먹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고려상품군이 아니었고, 진행적탐색이 충동구매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자제했다.

 

 시간이 돼서 도시락 휴게소(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에서 엽전을 사서 그걸로 음식을 몇 개 샀다. 기름 떡볶이, 닭강정, 수제떡갈비, 식혜, 밥. 엽전교환소 3층에서 플라스틱 식판에 담긴 것들을 야무지게 먹었다. 기름 떡볶이는 두 곳 모두 사서 먹어봤지만 맛이 둘 다 기대 이하였다. 심지어 한 곳은 사장님이 놀라울 정도로 불친절했다. 만사가 하기 싫은 일뿐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왔고 손님을 짐덩이로 느끼는 것 같았다. 전 같았으면 그런 태도의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반적으로 오늘 골랐던 음식들이 다 그렇게 괜찮지는 않았다. 다음이 있다면 참고가 될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서 빨래를 돌려놓고 스픽 불꽃을 살렸다. 말하기를 하면서 실제 말하는데 그렇게 도움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방식을 좀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잠든다는 생각도 얼마 못 하고 정신없이 잠들어버렸다. 일어나서 스픽을 마저하고 빨래를 가져와서 널었다. 하필 쨍쨍하던 햇살이 자고 일어나니 사라지고 날이 흐려져있었다. 네 시도 안됐는데.   


 빨래를 널고 돈키호테 1권을 마저 다 읽었다. 이번에도 클래식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돈키호테에 내 모습이 대입이 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소설은 그런 힘이 있나보다. 오늘 나는 인왕산과 북악산, 통인시장이 거인인 방랑기사의 모험에서 돌아왔다. 내 주변의 이발사와 신부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산초 빤사들도 종종 있을 것이다. 거기에 기대보자. 아직도 무찔러야 할 거인들이 너무나 많다. 나에게도 둘시네아가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나보다.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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