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낭독회
권 형사가 여동생과 몇 년째 의절하고 있음을 알게 된 건, ‘길거리 낭독회’가 끝나고 나서였다. 하나뿐인 그 여동생이 장기 투쟁사업장으로 알려진 학습지 회사인 ‘학생 교육’ 해고 노동자였다. 하필, 권 형사 여동생이? 아무리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로 엮인다는 한국 사회라지만 우연치고는 고약하지 않나, 했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비정규직이 천만인데, 권 형사 가족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나.
학생 교육 투쟁을 지지하는 길거리 낭독회가 열린 곳은 영화 십이도 강추위가 몰아친 서울 거리에서였다. 학생 교육 해고 노동자 세 명이 종로구 어느 성당 종탑에 올라 농성 투쟁 중이었다. 성당 건너편에 학생 교육지 본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종탑에 오른 세 사람은 자신들을 해고하고 탄압한 학생 교육지 회사를 빤히 보면서 농성 투쟁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나앉은 낭독회 참석자들은, 그 세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응원 함성을 질러댔고. 한겨울 한파를 무릅쓰고 성당 종탑에 농성장을 마련한 셋 가운데 한 명이 권 형사의 여동생이었다. 기온이 곤두박질친 데다 칼바람까지 몰아친 탓인지, 학생 교육 해고자를 지지하는 길거리 낭독회에는 오십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내 목소리가 종탑에 오른 해고자들에게 들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단편소설과 ⌜불꽃 영혼⌟에서 몇 장면을 읽었다. 학생 교육 해고 노동자들은 2,000일이 넘도록 투쟁 중이었다. 그 날짜를 헤아리는 것만으로 아뜩해진다.
낭독회를 마치고 혼자 전철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종탑에 머무는 세 여자 해고자를 생각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크리스마스도 지난 연말이었고, 전철역으로 뻗은 인도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로터리를 끼고 있는 빵 가게를 지날 즈음이었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작가님, 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니 거기 권 형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권 형사가 여긴 웬일이지? 고상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학생 교육 농성장이 아닌가. 고상필을 떠올린 나는 권 형사의 등장을 어찌 맞이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발걸음이 뜸했던 권 형사였다. 나를 미행한다?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랬으면 내 앞에 나타날 리 만무했다. 나도 고상필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가 종적을 감췄고,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너무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터라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권 형사가 말했다.
“소설 낭독 잘 들었습니다.”
“아, 뭐…” 입이 얼어서만은 아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라고 받기도 무안해하고 있는데, 내 심중을 알아챘는지, 권 형사가 선선히 말했다.
“여동생이 종탑에 올라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권 형사 입에서 여동생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학생 교육 노동자들이,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들에게 당한 일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권 형사에게 알려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동생이 용역 깡패들에게 수십 차례 얻어터지고 짓밟혔다, 통장도 가압류당하고. 회사는 걸핏하면 고소 고발로 사람 생목숨을 조였고. 회사 정문에 접근도 못 하게 쇠꼬챙이로 용역 깡패들이 울타리를 박고 담장을 쳤더랬다. 투쟁 지원 차량 타이어 펑크 내기와 사진 찍기 증거 수집은 예사고, 항의 플래카드 불태우고, 심지어 어떤 해고자에게는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서슴지 않았노라고,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냐고,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분노가 들끓는 한편에서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권 형사 여동생이 한파가 몰아친 이 겨울밤에 종탑에서 떨고 있지 않은가. 살을 에는 추위에 한데서 밤을 지새우지 않나.
그날, 나는 권 형사와 족발집에서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여동생에 얽힌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권 형사가 고상필에게서 여동생 흔적을 찾으려 애썼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족발 기름이 번들대는 입술로 하소연했다. 아무리 오빠지만 여동생을 죽어도 이해를 못 하겠다고. 권 형사는 여동생을 농성 투쟁에서 빼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노라고, 입술을 깨물며 털어놓았다.
“안 듣더라구요, 이 오빠 말을. 차라리 외계인하고 대화하는 게 낫지. 저 애가 진짜 내 동생인가 싶은 게…차라리 남이라면 안 보고나 살지…”
권 형사가 느꼈을 막막함에 가슴이 답답해 왔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 시커먼 강이 가로막았달까. 언젠가 권 형사는 그 강을 건너 여동생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기 전 권 형사가 말했다. “솔직히 형사만 아니라면, 고상필 씨한테 동생 일을 상담하고 싶었걸랑요. 직업혁명가가 이런 일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취중이지만 나는 권 형사의 솔직한 고백으로 들었다. 족발집에서 나온 우리 두 사람은 악수하고 헤어졌다. 성당 종탑이 불과 5분 거리였다. 나는 권 형사가 어디로 가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그로부터 석 달 뒤, 고상필은 체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