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사원 생존소설
예약을 해둔 안용철 부장의 이름을 대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직 안부장님은 안 오신 모양이다. 하긴 우리가 좀 일찍 온 이유도 있다. 안부장을 만나기 전에 김준표 팀장과 조용하게 상의하고 싶어서이다.
고급 횟집의 다리를 밑에 넣고 앉는 밀실은 무언가 은밀한 얘기를 나누기 좋은 느낌이 든다. 중요한 제안과 만남을 가질 때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클리세여서인가? 왠지 이런 곳에서는 진지한 얘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봉팀장 : 오늘 안부장님이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라.
김준표 팀장 : 그래? 그 사람하고 우리하고 할 얘기가 뭐가 있냐? 겉으로는 웃어도 완전 전쟁 중인 적인데?
봉팀장 : 전쟁이라.. 하긴.. 그럼 휴전하자고 그러는 건가? 근데 우리가 휴전하면 퇴사 아니냐?ㅋㅋ
김준표 팀장 : ㅋㅋㅋ 퇴사 니꼬르 백수인거지.
봉팀장 : 암튼 내내 궁금하다. 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문이 열린다. 안부장이 들어온다. 그런데 뒤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더 있다.
안용철 부장 : 아.. 먼저 와 계셨네. 안 늦었는데..
봉팀장 : 저희가 일찍 도착했습니다. 가까워서요. 안녕하셨어요?
악수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소개도 없이 악수를 하고 앉았지만 어디선가 본 낯익은 얼굴이다. 아니 얼굴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이 완전 낯설지는 않다고나 할까?
안용철 부장 : 봉팀장님. 전에 본 적이 있으시려나? 저희 회사 권혁건 부사장님이십니다.
권혁건 부사장 : 정식으로는 처음 뵙네요. 권혁건입니다.
내미는 명함에도 명확하게 박혀있다. M사 부사장 겸 CFO 권혁건. 아 그래서 오다가다 볼 수도 있어서 낯설지 않았구나
봉팀장 : 안녕하십니까? F사 영업3팀장 한상봉입니다. 이 친구는 사업전략팀 김준표 팀장입니다.
권혁건 부사장 : 아효, 말씀 안 하셔도 한방에 알아봤습니다. 업계에 워낙 유명하신 분들이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봉팀장 : 별말씀을 다하세요 부사장님. 저희가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자기를 한껏 낮추는 말품새와 태도에서 고수의 느낌이 난다. 하긴 M사 정도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을 정도면 그 내공이 보통은 아니겠지.
원래 내가 사려고 한 자리였는데 먼저 보자고 한 사람도 자기이고 자기 회사 부사장님도 오셨으니 자기들이 내겠다고 안부장이 설레발을 친다. 안 그래도 경쟁사 부사장을 만나는 게 본의는 아니지만 불편한데 얻어먹게 생겼네. 하지만 제일 비싼 코스의 정식을 통일해서 시켰다. 사실 자리가 궁금하지만 그것 때문에 입맛을 잃을 정도로 아마추어는 아니니까. 좋은 음식 많이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좋은 사케를 몇 순 돌리고 안주도 맛있고 술도 맛있어 다들 금방 취기가 올랐다. 골프얘기, 시장상황 얘기, 권부사장 둘째 아들 수능얘기도 나누다 보니 한 회사 동료와 갖는 술자리라고 착각할 즈음이었다.
안용철 부장 : 봉팀장님. 미리 말씀 못 드리고 부사장님을 모셔와서 미안합니다. 사실은 부사장님이 꼭 좀 두 분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권혁건 부사장 : 네. 제가 두 분 팀장님들 뵙고 싶다고 안부장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실례가 많습니다.
봉팀장 : 아이고 부사장님. 그런 말씀은 처음 만났을 때 하셔야지 지금 같이 부딪친 술잔이 몇 번인데 새삼 그러세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덕분에 맛있게 먹고 있는데요 뭐. 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 이제 드디어 본론을 얘기할 타이밍이 온 모양이다. 부사장과 안부장이 살짝 몸을 들썩이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난 가만히 있었지만 마음속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권혁건 부사장 : 드라마를 보면 이런 얘기는 이렇게 시작하더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을 저희 회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봉팀장, 김팀장 : ........
솔직히 이건 예상 못했다. 앞으로 있을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에 경쟁하지 말고 협력하자는 정도의 제안이 내가 상상했던 가장 파격적인 오늘의 주제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게 스카웃 제안이라니. 그것도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회사가?
권혁건 부사장 : 그동안 안부장을 통해서나 다른 회사 관계된 분들 통해서 두 분의 활약은 계속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냥 포장하지 않고 말씀드리자면 제 입장에서는 두 분을 제거하거나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저희 사장님과도 상의를 마쳤구요. 갑작스럽게 말씀드리는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봉팀장 : 당황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제안을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방금 들은 얘기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에 만도 시간이 필요할 정도네요. 회사 옮길 수는 있지요. 그런데 다른 데도 아니고 지금 현재 경쟁하고 있는 회사로 옮기는 건 좀 상식밖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팀장은 계속 주워 먹던 스기다시 흡입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아까부터 좀 과하게 마신다고 생각했었는 데 벌써 취한 건가? 이 친구야 중요한 시점이야. 정신 차려. 나 혼자로는 이 분위기 좀 벅차다구.
김준표 팀장 : 아까 드라마 얘기를 하셨는데 보통 이럴 때 주인공들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가더라고요. 일단 제 기분은 그렇습니다 부사장님.
권혁건 부사장 : 이해합니다 김팀장님. 그래서 설명을 더 드리고 싶습니다. 경쟁사로 바로 옮기는 건 제가 제 밑의 직원이라도 화를 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모시겠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안용철 부장 : 저희 회사가 자회사 하나를 스핀오프로 만들려고 합니다. 아마 서너 달 뒤면 런칭을 할 텐데 그 회사의 영업본부장과 전략사업본부장으로 두 분을 모시려고 하는 겁니다. 다루는 제품성격도 조금 다른 회사라 불필요한 소송에 휘말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알 거 같다. 새로 만드는 회사가 자리를 잡기 위해 영업과 전략에 베테랑들을 먼저 배치하고 싶은 거겠지. 어디 헤드헌팅 회사에 부탁해 구하느니 본인들 생각에 이미 검증되었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임원으로 앉히는 게 여러모로 위험을 헷지 하는 것일 테니까.
권혁건 부사장 : 속물 같은 멘트기도 하고 두 분이 충분히 예상하실 멘트라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받으시는 대우에 훨씬 좋은 조건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두 분이 같이 하시는 시너지를 확신하기에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저희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구체적인 내용은 안부장 통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사실 회사원이 회사를 옮기는 걸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국적을 옮기는 것도 아니고 학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호적을 파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할 테고.
봉팀장 : 네.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농담이 아니신 것도 알겠네요. 근데 받아들이는 제 입장에서는 농담으로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럽긴 합니다. 바로 답을 못 드리는 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혁건 부사장 : 당연하죠 팀장님. 아직 저희 구체적인 조건도 못 들으셨는데요.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는 걸로 하고 잊으시죠. 술도 많이 남았고 2차도 가셔야죠.
봉팀장 : 2차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시고 남은 술 마저 드시고 오늘은 일어나시죠.
권 부사장은 나나 김준표 팀장이 불쾌한 것은 아닌지 남은 술자리 동안 내내 신경을 쓰는 거 같았다. 첫인상에 대한 호감 때문인지, 워낙 베테랑 비즈니스맨에게서 풍기는 포스 때문인지 그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권혁건 부사장 : 그럼 들어가십시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 팀장님들
봉팀장 :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부사장님.
안용철 부장 : 봉팀장님 따로 연락드릴게요. 오늘 감사합니다.
헤어지고 한 10분간을 둘 다 말없이 보도블록을 보며 걸었다. 술기운도 있고 바람도 차서인지 말할 기분이 아니었나 보다. 말을 하지 않고 손짓과 턱짓으로 커피숍에 들어갔다.
봉팀장 : 어떻게 생각하냐. 진심인 거 같은데
김팀장 : 진심이지. 그냥 액면 그대로 생각하면 우릴 높게 쳐주는 거라 기분이 나쁘진 않다. 실행 여부를 떠나서.
봉팀장 : 궁금하긴 하다 조건이 ㅋㅋㅋ. 보통 준비를 한 게 아닌 거 같은데.
김팀장 : 아수라 영화 보면 곽도원이 황정민한테 '도대체 얼마에 날 살려고 했는지 숫자는 궁금하네.' 이런 대사가 있잖아. 딱 그 기분이긴 하다.ㅋㅋ
봉팀장 : ㅋㅋㅋ
말은 서로 이렇게 하고 있지만 우린 안다. 도덕적인 걸 떠나서 우린 옮기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쉬운 얘기지만 우린 그 정도의 승부사들은 못된다는 걸. 그저 우리의 승부사적 기질은 포커칠 때나 발현되는 못난이 수준이라는 걸.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사장님에 대한 의리 때문도 아니다. 사회생활에 그런 게 어딨 나? 가장 자본주의적인 조직에서 일하면서 그런 생각은 무지하다. 그냥 그냥 용기가 나질 않는다. 어떤 거에 내야 할지도 모르는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조금 뒤에 그러니까 2~3년 뒤에 이런 제안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근거 없는 아쉬움을 서로 가지면서 포장마차에서의 2차를 마치고 집으로 간다. 요즘 들어 참 다이내믹한 일들이 많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영업사원 봉팀장의 하루는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