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사원 생존소설
1년에 두 번 있는 영업본부 전체 워크샵의 날이 밝았다. 작년 두 번째 워크샵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올해는 상반기에 굵직한 프로젝트들 몇 개를 수주하는 바람에 아주 발걸음이 무겁진 않을 듯하다.
입사해서 처음 가보는 본부 워크샵에 팀 막내인 지원 씨는 무척 설레는 모양이다. 같은 본부에 배속된 입사동기들과 열심히 수다를 떨면서 여기저기 심부름도 하고 바쁘게 움직인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살고 있는 양평이 워크샵 장소라 무슨 마실 가는 느낌도 들고 일정이 끝나면 집에 가는 길은 가볍겠다는 생각을 한다. 본부장님은 오늘 무언가 큰 발표를 하실 것처럼 어제 팀장들과의 티타임 때 얘기하셨지만 아마 이번에도 한번 잘해보자는 식의 착한 말씀만 하시다 끝날 것이다. 문제는 각 팀의 하반기 수주 및 매출 전망일 텐데 영업팀장들 대부분 힘들고 어려울 거라는 죽는다는 소리만 할 테니 본부장님의 어두운 얼굴을 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좋진 않다.
하지만 워크샵이 무거운 얘기만 하러 가는 건 아니니까 애써 마음을 털어본다. 사실 본부워크샵이라는게 실적보고와 전망보고는 잠시고, 서로 얼굴도 더 익히고 알콜로 각자의 얼굴도 벌겋게 익히는 그런 행사 아니겠어? 그리고 실적회의 전 이벤트인 서바이벌 게임도 늘 해보고 싶었던 거라 은근 기대도 된다.
양평주민의 자존심을 걸고 점심을 추천하라기에 주저 없이 양평해장국을 픽했다. 다들 푸짐한 건더기가 좋았는지 정신없이 맛있게 먹는다.
본부장님 : 봉팀장은 자주 먹겠네? 양평 사니까?
봉팀장 : 상무님은 노량진 사신다고 매일 해산물 드시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오랜만에 먹습니다.ㅋㅋ
영업1팀장 : 반주 한잔 하시죠. 어차피 서바이벌게임도 전쟁인데 맨 정신으로 전쟁할 순 없잖아.
영업1팀장은 목소리도 큰데 술주머니도 크다. 참 술 좋아해 하면서도 한잔 가득 따라주었다.
보통은 두 팀으로 나누어서 서바이벌 게임을 할 텐데 이번엔 특이하게 세 팀으로 나누었다. 마치 스타크래프트 밀리게임을 하듯이 각자 알아서 도생하는 형식이라 무언가 작전이 필요할 것만 같다. 영업 1,2,3팀에 사업전략팀과 유지보수팀 인원을 나눠 배치하고 본격적으로 게임에 돌입한다.
아하. 무언가 작전과 전략을 활용하라는 주최 측의 큰 그림인가? 우리는 게임 전 이미 영업2팀과의 제휴를 마친 상태다. 이미 영업1팀은 숫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제휴된 두 팀을 이길 순 없을 것이다. 뒤통수를 맞아 어이없어하며 화를 낼, 이미 점심반주로 벌게진 영업1팀 고팀장의 얼굴이 벌써부터 상상이 된다.
게임은 예상대로 싱겁게 끝났다. 죽으면서 남은 컬러탄을 듬뿍 주고 간 전략팀 김준표 팀장덕에 마치 람보가 된 것처럼 원 없이 기관총 쏴대듯 기분을 냈다. 하지만 처음 해본 거라 재미는 있었으나 다시 돈을 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투복 여기저기에 다양한 색깔로 얼룩진 비비탄 자국을 서로 보고 웃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나름 재밌는 이벤트였다고 다들 칭찬한다.
본부장님 : 늘 그랬지만 하반기에도 시장전망은 밝지 않습니다. 협업 관련 제품출시도 좀 늦어질 같다고 연구소로부터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영업2팀장 : 왜 늦어진다던가요? 뭐 무기를 쥐어줘야 돈도 벌어올 텐데요 상무님.
사업전략팀장 : 제품기능 중 특허관련하여 검토사항이 좀 남아있고, 입법예고한 법령도 구체적이질 않아서 기능추가도 신중해야 한답니다.
봉팀장 : 일단 정식 제품출시는 좀 늦어지더라도 일반적인 제품소개서와 리플릿은 미리 만들 수 있지 않나요? 영업자료 없이 고객에게 소개하는 것도 좀 어색하잖아요.
사업전략팀장 : 네. 그건 따로 준비 중이고 거의 완료상태입니다. 다음다음 주 정도엔 팀장님들께 초안 보내드리고 피드백 받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영업본부에 합류한 신입사원들은 신기한 표정과 다소 벅찬 얼굴로 논의를 지켜본다. 아.. 이게 바로 실제로 보게 되는 회사라는 곳의 영업회의로구나. 그냥 모의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 실감 나는 현장이구나 하는 표정들이다. 반면에 워크샵을 몇 번 경험한 대리, 과장들은 언제 끝나나 하는 표정이다. 회의가 끝나야 맛있는 고기와 술이 시작되고 광란의 밤이 열리니까. 어쩌면 전략회의는 회삿돈으로 이런 걸 즐길 수 있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최소한의 성의인지도 모르겠다.
연구소에서 이번 워크샵을 위해 특별히 파견된 정용구 수석연구원의 간단한 신규제품 소개를 끝으로 상반기 영업본부 워크샵의 공식적인 일정은 다 마무리되었다. 이제 누구보다도 비공식적인 일정들만 남았다. 누군가는 술을 먹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를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카드도 칠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은 밤엔 더 술을 먹기 위해 펜션을 떠나는 인간들도 있겠지. 이렇게, 어떻게 보면 그 어떤 조직보다 그 어쩐 날보다 촘촘하게 알찬 1박 2일의 첫날이 흘러간다. 낮에는 맑았는데 추적추적 비까지 내려 더 분위기가 아련하고 아늑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