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전으로 시장에서 도시락 사 먹어요.
옛 왕들이 거닐었던 궁궐. 노랗고 빨간 은행잎으로 단아했던 궁궐은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화려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경복궁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우리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다. 화려한 궁궐 대신 오래된 시장, 통인시장이다. 낙엽이 흩날리는 길가에 서서 마주 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통인시장으로 가 주세요."
"머요? 먼 시장?"
"통인시장 모르세요?"
"그딴 작은 시장, 누가 압니까? 허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서둘러 준비해서 나왔는데 출발부터 목적지에 대한 부정이라니. 솔직히 조금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뭐, 틀린 말을 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최근 핫플로 주목받고 있는 서촌의 멋들어진 카페와 소품샵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투박한 옛날 시장. 통인시장. 오래됐지만 워낙 작아서, 모르실 수도 있겠다. 하며, 기사님의 호탕한 목소리를 뒤로 흘려보내본다.
슬쩍 옆자리에 앉은 둘째 얼굴을 본다. 새삼 시간이 빨리 흘렀음을 느낀다. 젖살이 통통한 아기였었는데.. 언제 저렇게 컸을까. 얼굴 선이 제법 갸름해졌다. 자그마한 입술 꼬리를 살짝 올리며 바깥 구경에 여념이 없다.
우리 둘째는 늦둥이다. 언니와는 일곱 살 차이가 난다. 언니를 질투하거나, 철딱서니 없이 굴 법도 한데, 이 아이는 그런 모습을 별로 보여 준 적이 없다. 뭐든 잘 먹고. 뭐든 괜찮고. 화가 나더라도 이내 풀어지는 바람에. 참 예쁨도 많이 받는다. 눈치가 빤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참고 있는 건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엄마인 나를 매우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아이임에 확실하다. 내 사랑, 내 기쁨, 내 비타민 나의 둘째.
하지만 순한 아이는 늘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언니는 언제나 '중요한 시기'에 있었다. 올해도 중요하고, 내년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전년도 중요했고. 큰 아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늘 모르는 것이 많았고 그래서 불안했고 흔들렸다. 말 잘 듣고 예쁜 말만 하는 둘째를 정말 사랑했지만, 두 손으로 둘째를 안고 있으면서도 늘 시선은 큰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외식을 하든 여행을 하든 까탈스러운 큰 아이가 늘 중심이었다. 새롭고 낯선 음식을 만났을 때조차, "한번 먹어볼게요." 하면서 눈을 꼭 감고 입에 넣고서는, "음 먹을만해요!" 어디서 이런 아이를 내게 주셨을까, 싶어서 감사했던 아이. 그 대가로 늘 두 번째였던 사랑스러운 내 강아지.
큰 아이가 뒷모습을 보여주는 날이 늘어갔다. "내가 알아서 할게."라며 내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그제서야 내 시선을 조금이나마 둘째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그제서야 말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 통인시장에 온 것이다. 오로지 둘째를 위해서!
그동안 가졌던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을지.
과연 기사님 말씀대로, 이 시장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다 보면 몇 걸음 못 가서 출구가 나온다. 매우 짧고, 가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굳이 이 시장을 힘겹게 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도 아이까지 데리고 택시까지 타고 말이다. 그 이유는 통인시장만의 특별한 이벤트에 있었다. 자, 그게 무엇인지 들어보시라.
시장 중간즈음에는 엽전. 도시락카페라는 곳이 있다. '21세기에 웬 엽전이냐.' 이 카페의 매력은 현금을 엽전으로 바꾸어 주는 곳이라는 점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만원당 엽전 스무 냥을 주고, 검정 플라스틱 빈 일회용 도시락을 내어준다.
이걸로 무얼 할까?
엽전 묶음이 굴러 떨어질 것 같아 걱정이 된다면, 엽전을 넣을 주머니가 있는 셔츠 같은 것을 입고 오면 좋다. 한 손으로는 언제든지 엽전을 바로 꺼낼 수 있어야 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도시락을 받쳐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주머니가 달린 가방 같은 것도 괜찮다. 뭐든지 '신속함'이 중요하다. 이제는 눈치채셨을까? 이 '엽전'이 이 시장에서는 바로 '현금'이 되시겠다.
벌써부터 둘째는 입이 귀에 걸렸다. 이 시장 안에서는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 원 이백 원, 천 원 이천 원 세알리지 않고 요 요 엽전으로 지불하는 이 방식이 얼마나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질꼬! 2층에서 결제를 하고 도시락과 엽전을 받았으면, 이제 신나는 여행이 시작된다. 줄을 선 사람들을 살살 피해 내려와서, 도시락 카페 입구 가있는 1층으로 나오면 눈앞에 펼쳐진 시장은 여태껏 아이가 알았던 일반적인 시장이 아니다.
눈을 크게 뜨고 시장을 둘러보면, 엽전 1냥 엽전 2냥.. 작은 팻말에 쓰인 글씨를 읽을 수 있다. 이 표시가 있으면 그 가게의 음식을 엽전으로 구매할 수가 있다. 구매 후에는 검정 1회용 플라스틱 도시락에 음식을 담아주신다. 그래서 순서를 잘 생각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뜨거운 음식의 열기가 그대로 전달되는 플라스틱 도시락통을 바닥에 내려놓지도, 들고 있지도 못하는 낭패를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그런 걸 챙길 쏘냐. 마냥 신이 난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데굴, 데굴.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신중하게 곰곰이 생각을 해가면서 시장을 여기, 저기 기웃기웃 댄다. 도토리 주우러 가는 다람쥐모양, 산책 나가는 강아지 모양. 내 눈에만 보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우리 둘째.
뭘 먹을지 고민하느라 저 작은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꼬.
통인시장은 기름떡볶이가 유명하다. 기름떡볶이도 물론, 엽전으로 살 수 있다. 나는 떡볶이를 받아 들고 줄을 서 있었고, 귀요미와 남편은 시장을 돌아다녔다. 기름떡볶이를 들고 다시 만난 둘째는 평소 좋아하던 잡채를 도시락에 가득 담고, 꼬마김밥 몇 개를 얹은 뒤, 용기를 내어 매운 떡볶이까지 담아왔다. 잔뜩 담아 올 줄 알았는데, 제법 신중하게 먹을 만큼만 골랐더라. 남편은 열무국수 한 그릇을 담고, 닭강정을 조금 담아왔다. 나는 조금 더 시장을 돌다가 쫀득한 밀전병과 매콤 달콤한 떡꼬치를 추가로 담았다.
이 작은 시장은 겉보기와 달리 먹거리가 풍성했다. 매콤한 닭강정부터 열무국수, 알록달록 꼬마김밥, 쫀득한 밀전병까지 발길이 닿는 곳마다 우리를 유혹했다. 그렇게 시장 구석구석에서 음식을 담다 보니, 어느새 우리 셋의 도시락이 완성됐다.
다 채운 도시락을 들고 다시 엽전 카페로 돌아오면 3층에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 차 마치 돛대기 시장을 방불케 했다. 간신히 빈자리에 찾아 들어가 앉아 도시락을 놓아두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들어왔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함께 묻어나는 피곤한 기색이 엄마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에구. 늦었구먼... 자리가 없네."
엄마들은 듬성듬성 난 빈자리에 아이들을 먼저 앉혀 먹이고는 본인들 도시락을 들고 한정 없이 서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앉아 있는 아이들이 흘린 음식을 처리하랴, 애들 입 닦아주랴, 물 갖다주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둘째가 식사를 하다가 그 장면을 바라보더니, 한 엄마에게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저희 이제 거의 다 먹었으니까요, 금방 앉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정신없던 그 엄마가 잠시 멈춰 아이를 바라보더니, 긴장되어 있던 표정이 순간 사악 풀리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응~ 그래, 어휴~ 고맙다."
우리 둘째는 늘 주변을 살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순수한 마음이 때로는 지나친 배려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하도 선하고 고와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저 아이의 엄마인 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진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양보한 뒤 엽전이 조금 남아서, 2층에서 다시 환불을 했다.
"엄마, 나 오늘 일기에 쓸 거예요! 아. 정말 오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너무 행복했어요!"
얘야, 대체 엄마가 뭘 그렇게 너한테 해주었다고. 이렇게까지 행복이라는 말을 거듭반복을 하니. 평소에 얼마나 안 챙겨주었으면 이럴까 싶은 마음에 측은하기도 하다. 입가에 살짝 묻어있는 떡볶이를 물티슈로 닦아주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고마워요! 엄마!"씩씩하게 감사인사도 잊지 않는 너.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향해 햇살 같은 미소를 보여주는 아이의 모습을 마음속에 열심히 담아 본다.
오늘, 너는 어땠니? 정말 네 말처럼 행복했니? 그래서 나는 오늘 좀 너한테 괜찮은 엄마였을까?
늘 둘 다 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항상 두 아이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런 이 엄마를 두 아이들은 마음 다해 사랑해 준다. 그런 존재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우리에게 늘 그런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앞으로 남은 우리의 여정 속에서도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겠지만. 오늘 내가 마음속에 담아둔 한 장의 사진 같은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추억 속에서 꺼내어 감상할 수 있겠지. 네가 행복하다고 해 준 덕분에. 오늘 나는 완벽한 최고의 엄마가 될 수 있었다.
항상 고마운 내 사랑, 둘째야. 엄마랑 또 나들이 가자.
통인시장은 휴무일, 오픈시간을 잘 확인하고 가셔야 합니다.
늦게 가면 문 닫는 경우가 있어요.
가시기 전에 뭘 먹을지 미리 생각해 두고 가셔도 좋습니다
서촌 골목 쪽으로 나오면 정자도 마련되어 있으니,
도시락 카페 3층에 자리가 없다고 너무 실망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기왕 오신 김에, 고즈넉한 서촌 골목골목 상권을 구경하고 가시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