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복권도 알아???
아주아주 어린 시절, 사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애기 시절.
몇 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는 건축설계일을 하셨다. 그래서 외국에 출장을 가셔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 어느날부터 엄마는 아예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시댁에 들어와서 지내셨다. 어머니의 시댁, 그러니까 나의 조부모님의 댁은 우리 아버지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집이었다.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강아지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사라졌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 가물 하다. 그 양철파란색 대문과. 대문옆 대리석벽돌. 작은 마당과 장독대. 집으로 들어가던 계단 옆에 자란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아직은 떫은 감들. 가을이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긴 막대기로 그 감나무를 털어 감을 수확해서 꼬지에 꿰어 말리거나,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매달아 말려서 곶감을 해 먹었던 기억도 난다.
가끔 꿈속에서도 그 집이 나온다. 정말 어렸을 때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기억으로 공간이 구조화되어 나타나는지 신기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아련하게 그 집이 떠오른다. 우리 할머니가 사셨던 그 집.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나, '오징어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예스러우면서도 익숙한 느낌의 그 골목, 그 집에서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애들까지 돌보는 그야말로 지금은 옛날 티브이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시집살이를 하셨으리라.
말귀도 못 알아먹는 꼬맹이들 연년생 남매를 그 환경에서 기르는 것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게다가 우리 할아버지는 굉장히 보수적인 분이셨다. 여자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할아버지만의 생각이 확고하셨기에, 우리 어머니는 그 고정관념을 깨부수어보려고 미니스커트를 입어보셨다고 하지만, 결말은... 아마 그 이후로 긴치마만 입으시지 않았으려나. 자주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실 때 들어보면, 자식들에게 굉장히 엄격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으셨던 가부장 그 자체 성격이셨던 것 같다.
그렇지만 바래진 할아버지의 사진 속 모습조차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노이즈 낀 화면처럼, 어딘가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장면만 흐릿하게 떠오를 뿐.
이렇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이유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무시다가 갑자기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고혈압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버지가 외국에 계셔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셨던 것 같다. 후에 그 집에는 제사를 지낼 때 오셨던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시고 난 뒤얼마 뒤에 오셨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빠 울지 마" 하면서 어깨를 짚어주던 딸아이를 안고 한번 더 오열하셨었던 것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불확실한 그때의 기억을 아버지께 한번 여쭈어 보면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대답해 주시려나.
그렇게 보수적인 우리 할아버지는, 장손인 아버지에게 첫 손주를 하필 딸로 얻으셨다. 바로 나다.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약주 드실 때마다 하셨다. 아마도 백만 이천 삼백 오십 회 정도 들었을 것이다...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너희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셨는지 아냐? 너 낳자마자 그러시더라. 애 감기 걸린다! 절로 데려가라! 떼잉~~~~ 쯧쯧쯧."
여자애라 섭섭해서 안아보지도 않으셨다는 말씀! 아~ 내가 아들이어야 했는데. 이런 시아버지의 태도에 어머니는 고생 끝에 출산하시고 얼마나 서운하셨을는지.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하신 것은 어린 나의 애교였던 것 같다. 꼬물이 시절, 월매나 할아버지한테 앵겨서 귀염을 떨어제꼈으면, 그렇게 보수적인 할아버지가 살살 녹으셨을까. '안아보기도 싫다'라고 하셨던 첫 손주를 둥가 둥가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시고. 참 많이 예뻐하셨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바람은, 그 이듬해 어머니가 4.8킬로의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주시면서 이루어지셨다. 아주 튼~실한 손주가 등장하셨으니, 애정이 내 남동생한테로 갔는 것이 정상이었겠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여자아이인 나에 대한 사랑이 변함없으셨다고 했다. 그렇게나 예뻐하셨으니, 당연히 나도 할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셨던 할아버지와 그래도 같이 자겠노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출근하실 때면, 아장아장한 걸음으로 할아버지를 쭐래쭐래 따라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와 동생이 쭐쭐 따라오는 게 귀여우셨는지, 슈퍼에 들러서 올림픽 복권을 한 장 사시고, 같은 빵 하나를 매번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 먹으라고 주셨다. (매일매일 사시던 올림픽 복권은 한 번도 당첨이 된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복권을 믿지 않으신다.)
사진: Unsplash의Waldemar
그 빵 맛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모양과. 폭신폭신한 감촉. 그리고 뇌리에 박혀 있는 그 이름.
호이호이빵
이거 아는 사람? 손?
찾아보니 1974년부터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보다는 아마 그 감촉이 거칠었을 테고, 속에 들어간 꿀도 쓸데없이 달았을 거 같다. 지금의 꿀호떡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폭신폭신하고, 달달한 꿀맛 잼이 가득 들어있는 그 빵.
할아버지 얼굴도, 냄새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 몇몇 순간의 기억만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을 뿐. 그렇지만, 호이호이빵, 지금은 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호떡꿀빵을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 오래된 빵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괜스레 반가워지는 것이다.
호이호이빵, 알아?
어린 시절 뒷모습만 어른어른 기억나는 할아버지처럼, 맛도 향도 기억나지 않지만 형태와 느낌만은 어름어름기억나는 그 빵. 꾸겨진 봉지를 고사리손으로 꼬오옥 쥐어들고 한입 베어 물며 배웅했던 그 추억에 젖은 빵. 아마도 잇몸이 녹을 정도로 달콤했을 그 빵. 남은 한 손으로 배웅했을 그 당시의 나. 이 모든 장면이 한 장의 사진처럼, 호이호이빵을 보면 마치 기억 속에 다시 떠오를 것만 같다.
오늘 저녁, 이제는 어른이 된 내가 슈퍼가 아닌 편의점에 들러, 호이호이빵을 닮은 꿀빵 한 봉지를 사서, 베어 물어봐야지. 그러면 오늘 밤, 꿈속에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