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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Oct 29. 2023

네가 첫 번째다

네 소박함이 좋다

  바야흐로 수국의 계절이다. 1층 화단에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피운 수국이 지나가던 내 발걸음을 붙들었다. 마치 이런 나를 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 했느냐는 듯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집 발코니 화분에도 수국이 피었으나 크기와 탐스러움은 화단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매사가 그러하듯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때문이다. 땅에서 자라는 것과 화분에서 자라는 것과의 차이가 이리도 다름을 느끼게 한다. 흙, 햇빛, 바람, 물이 식물의 생장에 요구되는 기본적 요소이다.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은 최적의 환경에서 잠재한 생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면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은 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은 있으나 대신 본래의 생장력이 억제되고 있음에 미안한 마음이다.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며 자란 아이와 집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며 자란 아이의 성장과 같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틈날 때마다 화분을 손질하는 아내의 모습에 화초를 좋아하셨던 아버님을 떠올린다. 아버님은 일제 치하 시절, 일본 후쿠오카농업전문대학에 유학을 다녀오셨다. 지금처럼 산업이 다양하고 개인의 역량과 소질에 따른 학문 선택의 범위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식민지 반도인 청년으로 선택할 수가 있는 학문의 폭이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예술, 문학 등 특정 분야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 해당 분야로 유학한 사람도 있었겠으나 그들과는 달리 농업 분야를 선택했음은 집안 사정을 고려한 차선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귀국 후 유학 경력을 바탕으로 교사, 공무원, 수리조합 등 관련 농업기관에서 재직하시다 5.16 군사혁명으로 공직생활을 강제 퇴직하셨다. 이웃에게 분양하기 위해 분갈이며 화초 손질에 바쁜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자식이 물려받지 못한 성정을 며느리가 대신 물려받았나?' 하는 생각에 아내는 알지 못할 혼자만의 미소를 짓는다.  

        

  발코니에 크고 작은 화분이 150여 개에 이른다. 동양란, 모란, 수국, 제라늄, 국화, 아이리스, 녹보수, 란타나, 알로카시아, 호야 등 외에도 십 여종이 넘는 야생화 화분으로 이름을 일일이 알지 못한다. 이 중에 수국 화분은 네 개다. 중간 크기의 화분 네 개에 분홍색, 파란색, 흰색의 수국이 손바닥 하나 크기만 한 예닐곱 개의 꽃봉오리를 피웠다. 화원에서 사들인 것도 있으나 대부분 아파트단지 내에서 주워온 것이다. 길어야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고운 자태를 뽐내다 꽃이 시들고 나면 보기 흉한 모습이 되고 꽃을 다시 보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인지 재활용품 분리 배출장에는 곧잘 화분이 나뒹굴고 있거나 버려지곤 한다. 또 이사나 집안 정리 등으로 버려진 것들이다.

  구순을 넘긴 장인·장모님이 이웃에 살기에 하루에도 두세 차례 발걸음하는 아내다. 오가는 걸음에 재활용 처리장 주변에 버려진 화초와 화분을 들고와 분갈이, 거름 주기로 꽃을 살려내거나 이듬해 피어난 꽃을 보며 우리 집은 꽃나무 병원이라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화분 중 제라늄 화분이 가장 많다. 어릴 적 아버님이 가꾸신 화단에는 많은 종류의 화초가 자랐고 때가 되면 저만의 자태를 뽐냈다. 제라늄 외 채송화, 봉숭아, 분꽃, 나팔꽃, 난초, 국화, 백합, 작약, 백일홍, 해바라기를 비롯해 내 키만 한 포도나무가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맺기도 했다. 국화만 해도 양손 크기의 꽃을 피우며 색깔, 크기, 모양 또한 다양하였다.


  집에 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하얀색 자기 주전자에 땅속에 묻어 담근 포도주를 담고 부엌에서 국화 꽃잎을 붙여 지져낸 부꾸미 안주 차림의 상을 내셨다. 어머님이 차려낸 술상을 받은 손님은 어디서도 받아본 적 없는 상이라며 좋아하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발코니에는 어릴 적 보았던 크고 탐스러운 국화 대신 작은 화분에 몇 송이 노란 꽃을 피운 화분 몇 개가 전부다. 화분이 한두 개씩 늘어날수록 발코니 공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두 줄로 늘어놔도 좁다고 느끼건만 이제는 세 줄이 되었다. 가진 것도 정리해야 할 때이니 이제 그만 주워오라 해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울지 모르는 채 일이 년이 지나면 어떤 것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저만의 꽃을 피운다. 죽었던 것으로 보이던 화초에서 예쁜 꽃이 핀 모습에 감탄하고 있으면 그 보라는 듯 아내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듯 만족해하는 표정이다.


  장독 크기의 화분에 제법 큼직하고 탐스러운 꽃을 피운 꽃 중의 왕이라는 모란, 좀처럼 꽃 보기가 어렵다는 녹보수(해피트리), 나팔꽃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 마는 아이리스를 보는 즐거움도 크나 내 기준으로 제일 마음이 가는 꽃은 제라늄이다. 예전에 보았던 모양과 색깔 외 다양한 품종이 개발된 탓에 꽃의 색깔 또한 다양하며 크고 작은 화분이 점점 늘어나 제라늄 화분만 40여 개다. 어쩌다 주말에 들리는 화원에서 새로운 품종을 볼 때마다 사들이기도 했으나 번식력이 좋아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리 키운 제라늄을 작은 화분에 옮겨 심어 이웃에게 분양하는 재미에 요즘 화분 손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아내다.

  꽃이 특이하거나 귀한 점에서 제라늄을 첫 번째로 꼽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기준으론 사계절 꽃을 볼 수 있는 점에서 제라늄만 한 게 없다. 화단이나 노지가 아닌 발코니에서도 잘 자라며 생육에 필요한 최소 환경이면 한겨울에도 화분마다 꽃을 피운다.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햇빛을 받게 하고 가끔 물 주는 것으로 족하다. 난처럼 물관리가 까다롭지 않고 사계절 꽃을 피우고 생명력이 강해 번식도 잘한다. 비록 모란이나 수국만큼 탐스럽지 않고 아이리스, 녹보수처럼 귀하진 않으나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여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제라늄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침 햇살에 이쁜 자태의 꽃망울을 터트려 오후 해 질 무렵이면 오므라드는 하루살이 아이리스가 다소 이기적이라 한다면 비록 화려하거나 탐스럽진 않아도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우는 제라늄은 늘 푸근한 이웃과 같다. 소통이 점점 단절되어 가는 삭막한 아파트 공간에서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우는 제라늄을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다.


  흙이 다소 말라 보이는 제라늄 화분에 아내의 눈길과 잔소리를 피해 바가지로 물을 주며 한마디 해본다. '우리 집에 꽃은 많아도 내가 좋아하기로는 네가 첫 번째다.' 제라늄이 방긋 웃으며 좋아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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