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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l Jul 12. 2024

감동과 억울함의 공존.

이 사회에서 실수가 다루어지는 방식.

지난봄 체육관에서 체조 대회가 열렸다. 6월에 열리는 전국 대회를 준비하며 칸톤에서 자체 순위를 가늠해 보는 대회였다. 리듬체조와 기계체조를 포함해 6세부터 고등부까지의 남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로, 작년에 한국에 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던 아이에게는 이번이 생에 첫 대회였다.


아이는 리듬체조, 평균대, 철봉, 트람폴린에서의 점프와 착지 이렇게 4개 종목에 참가했다. (저 체조 종목의 이름들은 필시 틀릴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네이버에서 종목의 이름들을 검색해 보았으나 검색하면 검색할수록 나의 체조에 대한 무식은 깊어졌다.) 아침 7시, 가장 어린 6, 7세 선수들의 워밍업으로 대회가 시작되었고 오후 5시의 시상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 하루동안 난 내가 평생 보아온 체조보다 더 많은 체조를 관람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체조를 시작한 아이는 종합순위 1위에 칸톤에서도 최고 평점을 받아 메달을 2개나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아이가 체조 신동이 아닐까 잠깐 오호라 했었으나 전국대회에서는 20등 밖으로 쭉 밀려났다. 취리히나 제네바 등 대도시 아이들의 기량은 유후~ 사뭇 달랐다.) 아이가 체조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미루고 오늘은 대회를 관람하던 중 내가 울음을 참지 못해 화장실로 숨어 들어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작년까지 딸아이와 같이 훈련을 했던 8살 Ariel(가명)의 리듬체조 순서가 되었다. 연습 때도 별 실수 없이 잘하는 아이라 맘 놓고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녀석이 긴장했는지 갑자기 순서를 잊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음악에 맞춰 동작을 바꿔보았지만 음악과 동작이 일치하지 않게 되자 당황한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코치에게 뛰어갔다. 음악이 멈추고 평균대, 철봉, 트람폴린 경기 또한 잠시 중단되었다.


체육관에는 긴 정적이 흘렀다.


난 거대한 체육관을 가득 매운 정적에 이 8살 아이가 납작해져 다시는 턱을 치켜들고 사뿐히 무대 위로 입장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아이의 실수가 실패가 되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정적을 깬 소리는 아이 친구들의 우렁찬 외침이었다.


"Hop! Hop! Ariel!! Hop! Hop! Ariel! (뛰어! 아리엘! 뛰어! 아리엘!)


무대 옆 벤치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던 친구들이 하나 둘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두세 아이들의 외침이 체육관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자 다른 벤치에 있던 아이들까지 무대 주변으로 뛰어와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홉, 홉, 아리엘! 홉, 홉, 아리엘!" 모든 선수들과 관중들이 이 외침에 합류하여 아이의 실수가 실패의 길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고 있었다.


모든 경기가 중단된 채 시간은 아이의 재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의 진행 따위는 잊은 건지 진행자들과 심사관들도 진심 어린 박수와 외침으로 아이의 재입장을 독려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위원회 사람들이 진행석에서 내려와 코치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다가왔다. 아이가 다시 경기에 참가할지 여부를 묻기 위해 다가가는 거려니 했으나 위원회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코치는 아이에게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했다. 마치 이 모든 과정이 경기 스케줄에 포함된 양 다들 여유로웠다.


코치의 품에서 벗어나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른 아이는 서서히 어깨를 펴더니 턱을 치켜들고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그 어떤 때보다 큰 박수 소리로 건물 외부에 있던 사람들까지 다 실내로 몰려들었다. 음악이 다시 체육관에 울렸고 아이는 한 동작 한 동작을 꼭꼭 밟아가며 실수 없이 경기를 마쳤다. 마지막 클로징 포즈에서 아이는 진심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아까의 울음으로 눈은 여전히 발그레했지만 얼굴 가득 환한 웃음으로 여유 있게 클로징 포즈를 마무리하고 코치와 친구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를 바라보는데 내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진행요원 자원봉사를 하던 아리엘의 엄마도 아이의 경기가 끝나자 별 동요 없이 바로 자신의 봉사위치로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도 태연하게 다음 선수들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며 화장실로 도망간 사람은 나뿐인 듯싶었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 눈물을 닦으며 이 주책의 원인이 무엇인지 더듬어 보려 했으나 내 감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감동적이잖아요라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이질적인 분노와 억울함의 감정도 섞여있었다.


실수에 대한 질책이 모질었던 사회에서 겪었던 과거 나의 여러 경험들이 떠올랐다. 내가 저질렀던 크고 작은 실수들은 대부분 비난받거나 일부러 무시되었고, 만회할 기회는 아주 드물게 주어졌다. 실수란 나에게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의 일부가 아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두려운 사건이었다. 난 그 두려움과 기나긴 자책의 시간들을 피하기 위해 더 적게 시도하고 덜 도전하는 쪽을 택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시기하고 응원하며...)


그날 그 체육관에서 실수를 대하였던 그들의 방식은, 운 좋게 그곳에 있었던 몇몇 자애로운 어른들만의 가치관이 아닌 이 지역의 사회적 합의임을 난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합의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실수란 당연히 거쳐가야 할 과정의 일부로 인식될 것이고, 실수와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습득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귀에 대고 뭐든 도전해야 한다고 부르짖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레 크고 작은 도전을 즐기며 커갈 것이다. 이 안전 제일주의의 나라에서는 아이들의 부정적 감정까지도 안전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의 에피소드로 나는 스위스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던 몇몇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전 다녔던 스위스 회사에서 한국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외주 시공업체들의 잦은 부도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잇따른 시공업체들의 부도로 회사는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안게 되었고 결국 사태의 해결을 위해 주한 스위스 대사관의 도움까지 받아야만 했다. 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된 장본인인 프로젝트 매니저의 향후 거취가 걱정되었으나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그 프로젝트에서 유일한 한국인 나뿐이었다. 어느 날 한국 시공사 선정에 문제점에 대해 내게 조언을 구했던 매니저와의 회의 후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 회사에서 괜찮은 거야?"

"나? 왜? 뭐가?"

"시공사들 계속 부도난 거 너 책임 안 져도 돼?"

"그거? 그거 최종 승인은 스위스 본사에서 난 건데?"

"그래도 네가 담당자였고 업체도 네가 선정해서 올린 거잖아."

"마지막 싸인은 사장이 했으니까 회사에서 알아서 책임지겠지. 그걸 내가 책임질 거면 내가 내 회사 차려서 혼자 사업하겠지. 난 파빌리온만 오프닝스케줄에 맞게 완성하면 되지."

"그렇구나. 좋다... 좋아."




아주 소극적인 내가 이곳에서 디자인 회사를 차리고 첫 작업을 인쇄소에 보내던 날이었다. 내가 보낸 데이터에 오류가 있어서 인쇄물 몇 만부가 다 버려지는 상상에 기인한 공포를 떨쳐낼 수가 없었던 그날 난 세상이 너무 무서워 숲에 들어가 펑펑 울었다.(난 숲에 들어가면 좀 안정이 되는 인간인지라 심신의 안정을 위해 뒷산 숲으로 들어갔었다.) 그렇게 몇 년 간 내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공포를 떨궈내며 한 작업 한 작업 무사히 마무리해 나가다 드디어 작년 크리스마스 행사 브로셔에서 나는 짜잔~ 대단한 실수를 저질렀다.


한 공연의 스케줄을 업데이트하지 않고 전년과 동일하게 인쇄해 버린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미 인쇄소에서 직접 각 가정으로 우편발송을 한 터라 스티커로 스케줄을 수정할 수도 없었다. 근데 그 천사 같은 담당자는 내게 괜찮다고 했다. 그냥 잘못 인쇄된 스케줄에 맞춰 공연을 더 하기로 예술가와 이미 협의를 했다는 것이다. 추가로 공연을 해야 하는 날에는 주최 측에서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다며 날 다독이는 담당자에게 난 연신 미안하다고 쏘리를 외쳐댔다. 그녀는 사람이 하는 일은 그럴 수 있다며 나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았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라는 말을 나는 여기서 참 많이 들었다. 의뢰인의 수정사항을 모두 반영하지 않았거나 오타가 있는 시안을 보냈던 나의 몇몇 실수에도 다양한 의뢰인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괜찮아요."라는 말을 내게 건네었다. 나의 정신머리의 행방을 묻거나 다음 계약 여부는 불투명할지도 모른다는 둥의 말하는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의 나의 삶이 조금은 수월한 이유일 것이다. 이들은 잘 사니까 치열하지 않아도 된다고들 한다. 그런데 저 '잘 사는'의 정의를 우리는 어떻게 내려야 할까? 우리의 국민소득이 그들을 넘어서면 우리는 저 '잘'에 부합하게 될까? 이곳에서의 '잘'은 일의 결과와 그에 따른 경제적 이득보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타인에 대한 관용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경제발전 속도는 역사적으로 전무하였으며 후무할 것으로 예상되는 특별한 사례이다. 우리가 현재 꽤 잘 살고 있다는 뜻이다. 숨을 좀 돌려도 된다는 뜻이지 않을까? 진정한 '잘'을 위해서 우리가 저 '잘'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약속하고 차 없이 걸어 장을 보러 다녀왔다. 조금 돌아가는 길을 골라,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아이와 과자를 나눠 먹으며 한숨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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