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김재원이란 아나운서가 아침마당을 오래 진행하고 이제 그만두면서 책을 썼나보다. 여기 저기 등장하기에 이혜성의 1% 클럽이란 유튜브를 보니 " 엄마의 얼굴 " 이란 책을 썼나보다. 13살에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못함이 자신의 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적었다한다. 그런데 그 대화를 들으면서 눈물이 난다. 어릴때의 해결하지 못한 / 않은 일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는데 그래서 나도 무엇을 해결하지 못했는가를 / 왜 눈물이 나나를 생각해본다.
아버지를 보낸지 어느새 45년이 지났구나.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죽은 후 닥쳐온 경제적충격으로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가 나고 도망다니고 간경화에 걸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시간들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살았구나를 새삼 돌아켜보게 된다. 16살의 어린 청년은 아버지의 병이 뭔지 몰라 당시 서울대학교병원에 가 젊은 의사를 잡고 물어본다. 간경화에 배에 물이 차 불렀다는 소리를 듣더니 얘기해준다. 내 아버지 곧 죽는다. 치료해도 죽고 그냥 놔둬도 죽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할려고 노력한 이들이 후회가 없다. 후회가 없이 살아라 라는 조의 얘기로 기억한다.
맞는 얘기라 생각해서 나의 최선을 다할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처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남은 재산을 남은 일가를 위해 쓰려는 할머니와 치료비로 태워 없애자는 나와 충돌이 컸다. 도망다니던 아버지의 유일한 재산인 논은 고모부이름으로 바꾸어져 있었고 그 논의 처분권은 그래서 할머니가 주장을 했다. ( 사업에 실패한 후이니 자세한 속사정은 나도 짐작만 한다. ) 할머니의 주장은 간단했다. 죽을 사람보다는 살아남은 사람이 사는게 중요하다였고 나는 아버지거고 아버지 돌아가시면 내가 유산상속자니 나는 팔아 병원비에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당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버진 제대로 치료다운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어느날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 나는 아버질 싫어하고 미워했다. 평소엔 친절한 사람이나 술만 들어가면 거칠어져 엄마를 때리는 일이 많았고 우리들도 맞으면서 자란다. 그래서 아버지장례를 치를때도 울지 않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장례를 치룬 이후로 재산과 관련된 모은 이들과 마음속으로 이별을 한듯하다. 할머니도 작은 아버지도 고모부도 보지 말고 살자라고...
한국에 계신 엄마가 치매가 시작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전혀 준비가 안되었음에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엄마를 돌보려고 / 함께 있기 위해서 한국과 캐나다를 오간지 3년째이다. 이제 60이 되었구나. 올해는 은퇴식까지 해버렸구나. 요즘 생각해본다. 왜 캐나다의 모든 삶을 내려놓고 엄마를 돌보려고 왔을까 !
유교적분위기가 강한 집안에서 자란 엄마는 당연히 외아들인 나를 애지중지하면서 키웠지만 나는 그것을 존중할정도로 효자는 못된다. 아버지가 죽고 혼자 과부로 평생을 산것 또한 엄마시대의 사고방식으로 당연하다하여 엄마가 가졌을 수많은 외로운 밤들을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내 생각만 하고 내 삶을 당연히 사는 평범한 이기주의자일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엄마에게 달려왔을까 !
치매가 진행중인 엄마에게 아들이 함께 있어 돌보는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 내게는 사실 엄마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를 위한 시간이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 후회로 내 인생의 마무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내 형편에 무리이지만 한다. 그것을 존중해주는 아내와 얘들이 고맙다.
김재원아나운서의 인텨뷰를 들으며
오랜만에 김창옥강사의 다양한 사례를 들으며 눈물로 시간을 보내본다.
미워했던 아버지였어도 아플때 제대로 손도 못쓰고 보낸 기억이 나에게 큰 암덩어리로 남았나보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잊고 살아도 여전히 그때 처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오늘 엄마와 함께 있으려고 애쓴다.
오래 사실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긴시간을 잘 버틸려면 한국에서 어떻게 하고 살아야하나를 ... 그래서 퍼스널브랜딩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