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도로스'의 해몽에 대한 집착
인간은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생명체이다. 우리는 인생의 3분의 1은 잠으로 보내는데, 그 시간은 우리가 80년 산다고 했을 때 27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다. 우리가 자는 동안 우리의 뇌는 낮 동안 얻은 정보를 정리하고 기억을 재구성하며 감정을 처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꿈을 꾸게 되는데, 잠에서 깨고 나면 그 꿈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되는 꿈이 있을 때면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는지 매우 궁금해진다. 그 꿈이 "신의 계시"와 같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문제 해결의 단서를 주거나 '예지몽' 같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중요한 삶의 기술로 사용하고 싶은 "욕심"이 든다. 이런 생각은 현대의 우리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미셸 푸코는 '성적인' 꿈에 관한 계보학적인 해석을 위해 2세기 활약한 작가인 '아르테미도로스'의 저작 '해몽의 열쇠'(Oneirocritica)'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문헌을 다루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해몽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살펴본다.
고대에는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꿈의 해석에 몰두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꿈은 현실의 징조나 미래의 전조를 시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한 꿈과 관련된 수많은 고대의 저서들에서도 나타나는데, 꿈을 해석하는 작업은 합리적 삶을 위해 매우 오래된 민간전통인 동시에 교양층에서도 인정된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꿈을 꾸었을 때마다 꿈을 해석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해몽가들에게 항상 문의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꿈에 나타난 징조들을 해석할 줄 하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었다. 아쉴 타타우스의 다음의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의 꿈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은 종종 꿈을 통해 인간들에게 미래를 계시하기를 즐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불행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운명의 신보다는 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통을 보다 쉽게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밀어닥친 일은 정신을 격렬한 충격으로 뒤흔들어 그로부터 인간을 헤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일을 겪기 전에 그 일을 예상하는 것은 그것에 점차적으로 익숙하게 함으로써 슬픔을 감소시킨다.
그래서, 아르테미도로스는 "해몽의 열쇠"라는 '일상적 삶을 위한 개설서'를 집필하였는데, 그는 꿈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상태로부터 파생되어 현재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에누푸니아'(enupnia)와, 세상사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시간의 미래를 말해주는 '오네이로이스'(oneirois)로서의 꿈이다. 전자는 현재 자신의 육체적 측면에서 결핍되거나 과도한 것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두려워하거나 욕망하는 것을 드러내는 꿈이다.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갈망하는 그 대상이 꿈에 등장하고, 배고프면 먹는 꿈을 꾸고, 과식한 사람은 토하거나 질식하는 꿈을 꾸며, 적을 두려워하는 자는 적들에 둘러싸이는 꿈을 꾼다. 후자는 '시간의 사슬'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가 가까운 미래에 사건으로서 나타날 그 어떤 것을 보여주는 꿈인데, 그것은 영혼에 신호를 보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그가 제시한 꿈의 또 다른 분류 방법은, 해석의 필요 없이 그 대상을 명확히 드러내는 꿈과 상징적 방식으로 다른 이미지들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꿈이다. '에누푸니아' 즉, '상태'에 관한 꿈에서는 욕망의 대상이 쉽게 드러날 수도 있고 그 대상과 유사하지만 다소 관련성이 멀리 있는 이미지에서도 드러날 수도 있다. '오네이로이스' 즉, '사건'에 관한 꿈에서도 사건을 직접 보여줄 수도 있고, 사건의 이미지와 간접적인 관계를 '우의적'(寓意的)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예컨대,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는 배의 이미지는, 꿈을 꾼 사람이 노예일 경우 파산이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만간 있게 될 노예 신분의 해방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해몽에 있어 봉착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는 꿈에서 본 하나의 장면이 '상태'에 관한 꿈인지, '사건'에 관한 꿈인지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르테미도로스도 이에 관한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중요한 것은 꿈을 꾸는 자신에 관하여 자문해 보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상태'의 꿈은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념과 비이성적 충동을 다스릴 줄 아는 '덕성스런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진짜로 덕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했다면 자신들의 육체에 대해서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균형 상태인 동요가 없는 지점에 있을 것이므로, 감성적 '상태'가 표출되는 '에누프니온'(enupnion)으로서의 꿈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사람이 자면서 꾸는 꿈은 그가 보낸 낮만큼이나 소란스럽다."라고 말하였고, 플루타고스는 깨어있을 동안은 욕망에 대항해 싸우고 저항할 힘이 충분히 있지만, 밤이 되면 도덕적인 통념과 '법률'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그나마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해 준다.
아무튼, 덕성스런 영혼은 드물기에, 평범한 영혼인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상태'에 관한 꿈을 꾸게 된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욕망이나 증오는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반면, 자신의 꿈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에 대하여는 징후로서 우의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예컨대, 해몽술에 무지한 남자는 꿈속에서 자신이 욕망하는 여인을 보거나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스승의 죽음을 그대로 보게 되는 반면, 해몽가는 꿈 속에서 자신이 욕망하는 여인을 가리키는 이미지 즉 '말, 거울, 배, 바다, 사나운 맹수의 암컷, 여성의 의복' 등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스승의 죽음과 같은 이미지는 자기 집 지붕이 무너지고 자신이 참수형을 당하는 것을 보는 징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편, '사건'들에 대한 꿈도 마찬가지로, 명백한 '정리적(定理的)인 꿈'과 상징적인 '우의적인 꿈'으로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정리적 꿈은 해석의 여지나 불가피한 지연 없이 그것이 예고하는 바를 곧장 드러낸다. 반면 후자는 우의적인 그것이 곧바로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정리적 꿈과는 쉽게 구별되는데, 이 경우 그것을 검토하여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만, 상태에 대한 꿈을 꾸지 않고 사건에 관한 꿈만 꾸는 플라톤과 같은 '덕성스런 영혼'은 대개 정리적 꿈들이 제시하는 명백한 비전만을 알아볼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욕망과 분노'라는 영혼의 두 부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지혜가 머무르고 있는 영혼의 세 번째 부분을 격려한 뒤 마침내 휴식에 몸을 내맡길 때, 그대도 알다시피 영혼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진리에 가장 잘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평범한 영혼인 우리가 꾸는 사건에 관한 우의적 꿈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아르테미도로스는 비슷한 것들을 서로 접근시켜 보는 유추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꿈의 이미지와 그것이 예고하는 미래의 요소들 사이의 '성질상의 유추'와 '가치상의 유추'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전자로는, 예컨대, 몸이 불편해지는 꿈은 장래의 건강이나 재산이 나쁜 상태가 됨을 의미하고, 몸이 부어오르는 꿈은 몸이 유독한 물질로 가득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질적 동일성'에 의한 유추와는 구분되는 것이 '상징성 유사성'에 의한 방법이다. 예컨대, 사자에 관한 꿈은 육상경기에서 우승할 징조이며, 폭풍우에 관한 꿈은 불행의 징조인 것이다. 또한, 결혼과 죽음은 둘 다 일종의 삶의 목적이나 종말(telos)의 '동일한 범주'로 간주되기 때문에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밖에 신앙이나 민간 속담, 신화적 주제, 관습의 유사성에 의한 유추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꿈이 나타내는 행위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면 그 꿈은 길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에 관하여는 다음 기준을 제시한다. 꿈에 나타난 행위가 자연, 법률, 풍습에 부합하는지,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규칙과 관행, 이름, 시기에 부합하는지 여부이다. 이에 부합하는 꿈의 모든 장면은 길조이며, 반대되는 것은 흉조라고 하면서, 꿈속에서는 길조가 꿈 밖에서는 나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아르테미도로스는 말한다.
꿈은 그 서사보다는 어떤 장면이나 이미지로 각인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잊혀져 간다. 만약 용한 해몽가가 있다고 해도, 그 꿈은 꿈을 꾸는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 그가 처한 상황, 심리적, 육체적 건강 상태, 그날의 경험, 그날 먹은 음식, 기분, 불안 상태 등에 따라 수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 사람의 성장과정, 걸어온 길, 의무감, 책임감, 삶의 무게, 성숙도, 성격 등의 기질 등 개인의 특수한 상황과 양상을 고려해야 하는 매우 복잡한 영역으로, 누군가가 대신 해석해 줄 수 없는 영역이다. 꿈의 각본가인 무의식이 꿈을 어떤 식으로 어떤 상징과 비유에 담아 표현할지에 관하여 그 누구도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기 때문에, 아르테미도로스가 해몽의 일반화하여 분석하려고 했던 시도도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인간은 항상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미래에 현재를 담보 잡혀 사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이 안식을 취하는 꿈 속에서도 영혼은 여전히 분석하고 미래의 무엇을 제시하려고 하는 피곤함을 안고 산다. 모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은 '덕성스런 영혼'이 된다면 우리 영혼도 자는 동안 쉴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개꿈에 대한 해몽보다는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숙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