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지배하는 기술패권 쟁취의 '무기'가 된 규제
21세기 디지털 시대 혁신을 AI, 빅데이터, 5G-6G 통신 기술로부터 나오고, 이 모든 핵심기술을 구현하는 것은 반도체 칩(semiconductor chip)이다. 반도체는 단순한 무역 상품이 아니고, 국가 안보와 기술 패권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략 물자'(strategic goods)이다. 특히 최근 부각되고 있는 AI 반도체는 인공지능 연산에 최적화된 고성능 칩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반도체의 전략적 중요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칩은 '적층'(stacking) 또는 '3차원'(3D) 구조 기술을 활용하여, 한정된 칩 면적 위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나 메모리 셀을 집적하여 성능과 용량을 극대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반도체 공급망(supply chain)은 칩 설계, 장비, 소재, 제조, 후공정 등의 여러 국가 및 기업이 분업하여 생산하고 유통하는 초국가적 네트워크이다. 따라서 '관련시장'은 매우 광범위하고, 하나의 단계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 연속적인 시장(sequential market) 형태를 띤다.
대표적인 기업을 살펴보면, 반도체 설계는 미국의 NVIDIA, Qualcomm을, 제조 및 파운드리(위탁생산)는 대만의 TSMC, 우리나라의 삼성전자를,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 미국의 Applied Materials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연계된 체인은 글로벌 경제의 혈관과 같아서, 과거 이 시장은 대체적으로 자유무역과 국제경쟁법이라는 '법의 지배'(rule of law) 규범 하에 작동하며 효율성과 공정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현재 이 규범적 질서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국제 지정학적 현실 앞에서 완전히 붕괴했다.
미국은 중국의 첨단 기술 자립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면서, 반도체를 경제적 상품이 아닌 전략적 무기로 간주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법은 공정한 통제의 수단이 아니라, 권력을 투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2022년 8월 9일에 제정된 미국의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은 자국 내 기업의 보조금 지급과 함께 중국 내 생산 능력을 확장하는 제한 의무를 부과하였다. 또한, 수출 통제를 강화하여 ASML 같은 핵심 장비 기업들의 중국 수출을 제한함으로써 법적 관할권을 국경 넘어 행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유럽연합(EU)은 2023년 9월 21일에 시행된 '유럽판 칩스법(European Chips Act)'과 '외국 보조금 규정(Foreign Subsidies Regulation)'을 통해,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통해 자국 중심의 방어적인 규제 블록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 역시 2015년부터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투입하고 반독점법을 외국 기업에 대한 비대칭적 제재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법을 자국 이익 관철의 도구로 적극 사용하면서, 국제 경쟁 질서는 힘의 논리로 점철되어 가는 '힘에 의한 통치(rules by power)'의 극치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자국 우선주의 법'의 난립으로 인해 기존의 국제 법치 규범은 유명무실해졌다. 기존 국제 경제 질서의 법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국제통상법의 영역에서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체제가 관세, 보조금, 덤핑 등을 다루며 국가 간 무역의 차별을 금지해 왔고, 국제경쟁법의 영역에서는 조약을 기반으로 하진 않지만, '국제경쟁네트워크'(ICN, International Competition Network)와 같은 협력 포럼이나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 산하 '경쟁 및 소비자 보호 정부 간 전문가 그룹'(IGE on Competition Law and Policy) 등을 통하여 각국 경쟁 당국 간의 정책 조화(harmonization)와 협력을 도모해 왔다.
그러나, WTO 분쟁해결기구의 최종심 기능은 2019년 12월 11일, 미국의 지속적인 상소기구 위원 임명 거부로 인해 심리에 필요한 최소 정족수(3명)가 미달되면서 사실상 마비되었는데, 이 상태는 현재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이는 국제통상법 체계의 붕괴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AI, 빅데이터, 온라인 플랫폼 등 디지털 경제의 핵심 분야는 본질적으로 글로벌 기업에 의해 지배되므로, 이들의 독과점 행위, 데이터 착취 등은 단일 국가의 경쟁법이나 ICN의 협력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각 국의 기술 패권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일관된 규제의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즉, 기술 패권 경쟁은 단순히 경제적 경쟁이 아닌 지정학적 갈등으로 심화되어, 규범의 통일성(harmonization) 대신 파편화(fragmentation)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국제통상법과 국제경쟁법의 두 축 모두가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삼성전자, SK Hynix와 같은 중견국의 기업들은 법적 안정성 대신 정치적 압력에 따라 투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힘의 지배' 상황에 놓였다. 즉, 미국 행정부의 정책 변화나 지정학적 충돌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힘의 언어에 따라 투자와 생존을 결정해야 하는 위험에 처했다. 법이 모두에게 공평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권력의 의지를 대변하면서, 국제 질서는 규칙 기반이 아닌 힘의 지배로 회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법치의 붕괴가 반도체 공급망을 넘어 디지털 경제 전반에 걸쳐 훨씬 더 큰 혼란을 예고한다는 점이다. AI와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글로벌하게 작동하지만, 이들을 규율하는 법은 지역 단위로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조화는 심각한 소비자 후생의 불균형을 낳을 수 있다. 규제가 약한 지역의 소비자는 데이터 착취와 플랫폼 독점 행위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규제가 강한 지역은 기술 혁신의 위축이라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AI 시대의 공정 경쟁을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국제 디지털 경쟁법의 기준 설정이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WTO와 같은 기존 법적 틀이 해체될 위기에 처한 현실은 그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응으로 이상적인 국제 규범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이러한 '법의 부재' 속에서 우리나라 규제 당국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역할은 단순히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을 넘어, '기준을 만드는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다. 공정위는 자국 기업의 경쟁력 보호와 국제 규범 준수라는 상충되는 목표 사이에서 규제의 완급을 조절하는 묘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ICN과 같은 기존 협력체를 최대한 활성화하고, EU의 선도적 규제 모델을 벤치마킹하는 동시에 한국의 독자적인 기술 규범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 모델을 기반으로 '힘의 논리'에 공통적으로 피해를 보는 중견국들과의 규범적 연대를 통해 자율적인 시장 질서를 지키려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형성하여 힘의 지배에 대한 '규범적 저항선'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사실, 법의 지배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기술 패권 전쟁의 혼돈 속에서 생존을 보장하는 묘책이 될 수는 없다. 규제의 완급 조절이나 국제 연대는 기술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이 모든 노력의 근저에는 기술 패권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일지라도,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정의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철학적 각성이 필요하다. 법의 지배란 '강자도 규칙에 구속받는다'는 국가 간의 신뢰이며, 이 신뢰를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성찰과 실질적인 노력이야말로 국제 질서의 혼돈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마지막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