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 고장 났어요?
어쩌다 일요일에 대중목욕탕에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친걸음이니 그냥 갔다 와야지 하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서 앉을자리가 없었다.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휙 한번 둘러보았다. 겨우 틈새를 발견하곤 누가 가서 앉을세라 재빨리 그곳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한참 지나서 보니 맞은편 자리에서 콸콸 물이 넘쳐흘렀다.
‘아니 물이 저렇게 넘치는데 모르시나?’
유심히 바라보니 세게 틀어 놓은 물은 순식간에 대야를 넘쳐나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모르는 듯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사람의 수도꼭지를 힐끗 보았다. 다행히 그 사람은 물을 틀어 놓지 않았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가서 말해줄까. 수도꼭지를 잠가줄까. 잠깐 깜박했나? 벌써 마음은 몇 번이나 일어섰다 앉기를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대야에 가득 담기고도 어쩔 줄 몰라 철철 넘쳐흐르는 물을 보더니 물을 휙 쏟아버리고 다시 그 자리에 대야를 놓는다. 물은 순식간에 조금 전하고 다를 바 없는 형태로 넘쳤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확 올라왔다.
‘아니 저 미친년 아니야? 개나리 십장생 같은 … ’
목구멍까지 욕이 올라왔지만 뱉을 용기는 없었다. 누구 동조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기 집에서도 수돗물을 틀어놓고 저럴까?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오십은 넘어 보이는 중년의 어른이, 난 그때부터 내가 목욕을 하러 왔는지 그녀를 감시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관심 끊을까. 주인은 한 번 안 와보나? 아니 옆 사람은 지적 좀 안 해주고 뭐 하냐. 세신 하는 아주머니께 가서 말할까? 내가 온갖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때도 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가끔 그녀가 플라스틱 대야를 휙 뒤집어서 넘치는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받는 행위를 했지만 한 번도 수도꼭지를 잠그거나 물의 양을 줄이지는 않았다.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향을 소개할 때면 으레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는 말을 먼저 했다. 어디 내 고향뿐이었던가, 우리나라의 웬만한 곳은 산 좋고 물 맑은 것이 자랑이었다. 아니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길 가던 나그네가 “물 한 모금 얻어먹읍시다.” 하던 말을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우리의 정서였다. 그렇게 자랑스럽던 우리의 산천山川은 산업발전과 기후변화 등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한 환경오염으로 많이 더러워졌다.
지금은 계곡물은 고사하고 수돗물도 그냥은 먹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상표 붙은 물을 사 먹거나 수돗물을 정수淨水해서 먹는다. 그러니 옛날처럼 “물 한 모금 얻어먹읍시다.”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과 수질오염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되어 있다. 다행히 우리는 상하수도시설이 잘되어 있어 물 부족을 모르고 산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가끔 물 부족현상이 일어나고, 직접적으로나 또는 매체를 통해서 느끼고 있다.
우리가 물을 많이 사용하면 물이 더 많이 오염된다고 한다. 누구나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돈이 나가지 않는 물이라도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아끼며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후손이 물 부족 국가가 아닌 깨끗한 물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살짝 머금고 그녀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저기요. 수도꼭지가 고장 났어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진지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짧은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철철 울고 있던 수돗물이 뚝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