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을 엮는 다리

(경북신문 25년 이야기보따리 가작)

by 박정옥

삶을 엮는 다리

박정옥

여행이란 쉼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찾아 나서는 것도 여행의 맛이다. 무섬과 외나무다리란 이름만으로 호기심과 기대가 생겨 영주로 향했다. 탄산리 원암 정류소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무논에는 방금 심은 듯한 벼포기가 일렁이고 둑길에 개망초가 실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하얗게 끼를 부리는 오후였다. 한참을 걸어도 십여 분이면 도착한다는 무섬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다고 선택한 길이 잘못 든 길이었다. 발걸음을 돌려 반대쪽으로 갔다. 푸서리의 뭇 이파리가 부서지는 햇살에 초록으로 반짝였다. 나무에서 만나는 초록은 초여름이 가장 아름답다. 너무 여리지도, 너무 짙어서 턱 하고 숨이 막히지도 않는 색감이다.

얼마 후 무섬마을과 바깥 지역을 이어주는 수도교와 마을이 보였다.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만나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이 휘돌아 흘러 섬처럼 보인다. 물 위에 떠 있는 마을 수도리(水島里)란 뜻의 물섬마을이 입으로 전해지면서 무섬마을로 지명이 변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무섬마을과 외나무다리에 대한 안내 글이 있었다.

무섬마을은 조선 중기에 박수(반남 박씨)가 터를 잡아 살다가 오랜 세월 뒤 박씨 가문의 사위 김대 (선성 김씨)가 들어와 일가를 이루어 살면서 두 성씨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박수가 지은 만죽재와 김영각이 건립한 해우당이 국가 민속 문화유산에 포함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양반의 표상 같았던 기와집 외에도 초가집 구조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지난 시대의 양반과 평민들의 가옥 구조와 생활 문화를 함께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이 떠올라 잠깐 추억에 잠겼다.

무섬마을 전설에 뇌전증을 앓는 아내를 정성으로 보살폈던 심성 바른 ‘김낙수’란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찍 생을 마감한 아내는 마을에 큰 불이 났을 때 죽어서도 녹의홍상 휘날리며 불길을 잡아 은혜를 갚았다는 권 씨 부인의 이야기 있다. 남편이 고마웠던 아내가 밤새 붉은 치마에 내성천의 물을 담아 나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내성천 위로 길고 아련한 나무다리가 보였다. 우주가 반짝이는 것 같은 모래 천변과 하천의 너비가 큰 강폭만큼 넓었다. 마을의 고택보다 물 위로 길을 만든 유려한 외나무다리에 마음이 더 끌렸다. 다리는 여느 다리처럼 직선이 아니고 나무판을 이어서 굽이굽이 물결처럼 만든 곡선으로 아득해 보였다.

외나무다리는 수도교가 생기기 전까지 마을과 바깥을 이어준 통로였다고 한다. 옛날에 이 다리는 섶다리였다. 하천에 단단한 소나무나 참나무로 기둥을 박고 나무의 잔가지나 짚을 이용 해 연결해서 다리를 만들었다. 홍수가 나서 섶다리가 떠내려 가면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다. 무섬마을에 매우(梅雨)가 지나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하천에서 다리를 엮는 모습이 연상된다. 다리는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장 보러 가는 다리, 상여 나가는 다리로 3개의 섶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무섬은 좁아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은 다리 건너편에 있었다.


외나무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리 폭은 삼십 센티 정도인데 길이가 백오십 미터나 된다고 한다. 다리의 시작은 모래땅부터지만 얕은 물살을 지나 거칠게 꿈틀대는 물살까지 지나야 건너편에 닿을 수 있다. 외나무다리에 올라서니 기분 좋은 떨림과 두려움이 함께 왔다. 다리 아래 하천 심부는 그리 깊어 보이지 않고 윤슬로 반짝거렸다.

볕살을 피하느라 양산을 펴 들었다. 건너편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울림으로 들려왔다.

“아유, 양산 접어요. 물에 빠져요.”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인데 양산 좀 펼친다고 물에 빠질 리가 ….’

햇살을 가리고 싶었기에 못 들은 척 다리로 들어섰다. 도도히 움직이는 물살을 보니 물결에 눈빛이 휩쓸려 빙그르르 돌았다. ‘이쯤이야, 고향 개울보다 얕은걸.’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발을 떼어 다리의 중간쯤 도착했다. 어린것을 안고 있는 젊은 아비가 다리 건너기를 포기하고 되돌아선다. ‘젊은 남자가 겁이 많네.’ 생각하며 옆에 있는 작은 나무판으로 비켜서서 그가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외다리지만 중간중간 비켜 갈 수 있게 비상 나무판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때 순식간에 어디서 왔는지 높새바람 한줄기가 양산 속을 휙 하니 헤집고 나간다. 양산살이 뒤집어지면서 내 몸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유순하게 보이던 물살이 소용돌이치면서 거칠게 달려드는 듯했다. 빠르게 양산을 접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살아오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늘처럼 자만이 바탕에 숨어있는 날이 많았다. 나의 결정이 교만이나 만용이 아니고 확신이고 용기라고 다독이며 걸어왔다. 내 삶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았다. 처음엔 쉬워 보여도 건너가다 보면 다리 아래 거친 물살이 출렁거리고 언제 어느 쪽에서 세찬 바람과 폭우가 휘몰아칠지 몰랐다. 헛된 생각과 헛발질을 하는 순간 다리 아래로 떨어져 거친 물살에 휩쓸려 갈 것이다. 무모한 용기 뒤에 불안감과 두려움을 숨겨야만 했다. 이런 나에게 말없이 논밭에 엎드려 있던 부모님의 등판은 쉼 다리가 되었다. 외나무다리의 비상 나무판처럼.

아기 아빠도 낭만이 흐르는 다리를 끝까지 가보고 싶었으리라. 건너편에 먼저 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면서 아내를 향해 손짓했다. 아내 앞에서 당당히 다리를 건너는 모습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람을 등지면서 어린것을 꼭 껴안고 돌아서는 길을 선택했다. 양산이 뒤집히고 나서야 젊은 아비가 선택한 것은 겁이 아니라 용기란 걸 알았다. 또 한 겹 아집을 벗겨낸다.


마음을 다잡고 접은 양산을 지팡이 삼아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떼며 남은 다리를 건넜다. 이 아슬아슬한 길을 무섬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건너고 아이들은 배움을 위해 건넜다. 그리고 인생 끝나는 날 마지막으로 상여를 타고 건너면서 다리와 이별했다. 전설 속의 권 씨 부인도 꽃가마 타고 섶다리를 건너오고 상여를 타고 섶다리를 건너갔을 것이다.

이제 외나무다리는 무섬의 명물로 또 다른 길이 되었다. 역사 깊은 마을 이야기와 아릿한 전설을 가슴에 담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빛이 사위어가는 숲 속에서 담사리새 울음소리 들린다. “소쩍소쩍 소소 쩍…….” 이제 여름이 짙어지려나 보다. 애달픈 울음이 끝나자 바람 한 줄기 지나고 후드득 빗방울이 듣는다. 무섬과 외나무다리는 바람비를 맞으며 여행객을 배웅한다.


경북신문 25년 이야기보따리에 가작으로 당선되어 브런치에 옮겨둔다. 게으름을 채찍하며...

사진 _이재수님


keyword
작가의 이전글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