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10년 차 전역하는 부사관이다. 군생활은 이등병부터 중사까지, 현역병부터 특전부사관, 그리고 전역지원서를 쓰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자원입대일정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병역법에 따라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만 한다.미디어에서 처럼 영장을 받아보고 싶었지만, 20살의 나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군대에 가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자격증이나 특기가 없었던 나는 2013년부터 병무청사이트를 들락날락하였으나 국방부에서는 입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최 2013년에 무슨 일이 모르겠지만 입대자가 많았다. 결국 2014년이 되어서야 입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보충대에가다
보충대는 각 사단으로 가기전 3일정도 체류하며, 신체검사와 군용품을 받는 곳이다. 논산훈련소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체류하게된다. 그 날은인생에서 잊지 못하는 날들 중 하루다. 보충대 인근 자차로 10분거리의 식당. 가족과의 마지막 식사는 춘천 닭갈비였는데 이상하게도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약간은 우울한 식사를 마친 뒤 시간이 다가왔고, 가족을 뒤로하고선경건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경례하는 모습을사진을 찍었고, 페이스 북에 남긴 뒤 입대하였는데. 그 사진이 나에게 흑역사를 줄지는 상상도 못 했다. 두세 달 뒤 페이스북을 확인해 보니 왼손으로 경례를 해서 친구들에게 다시 입대하라며 놀림을 받았다. 지금 회상해도 부끄럽지만 즐거운 기억이다.
306 보충대 입구 출처 https://m.blog.naver.com/giopise/220225815044
입영한 뒤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 보고 있을 때무섭게 생긴 조교들이 분위기를 조성하고,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되면 보충대의 생활이 시작된다. 현재는해체된 보충대에 대해 가장 인상 깊었던세 가지를소개한다.
첫 번째는 보충대 병영식당에서 먹었던 김치다.그 맛은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먹던 김치랑은 전혀 달랐기 때문 (부정적인 맛으로, 퐁퐁맛이 났었다.)그리고 김치의 영향인지, 낯선 환경 때문인지 보충대에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닌 걸 보면 입대할 때 다들 겪어보는 현상인 듯하다.인터넷에 많이 퍼져있는 변비 썰은 입대 이야기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단골 스토리이다.
두 번째는장구류나 피복류를 받기 위해 이동할 때 입었던 판초우의(군대에서 사용하는 얼룩무늬 우의, 몇 명이 사용했고 세탁은 언제 했는지 모를..)에서 나던 냄새.. 이제 군대 왔구나 정신이 번쩍 들면서조교들 말소리에 맞춰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몸에 느껴지는 불편한 촉감과 향은잊히지않는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다 아실만한 느낌일거다.
세 번째는 보충대의 생활을 마치고, 서로 다른 사단의 신병교육대로 배정받을 때 같이 있던 동기들의 배치될 부대가 정해지기 때문에 희비가 갈리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이는 최전방 부대요, 어떤 이는 도심지요, 필자는 수기사로 당첨. 수도기계화사단이 수도방위사령부인줄 알고 히죽히죽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장갑차를 타고 다니는 기계화보병 부대라고 했다. 그것도 메이저 부대라서 훈련도 많고 힘들다고 옆자리 동기가 알려주었을 때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수리부속 계원
신병교육대에서 5주간의 기초군사교육을 받고 향후 20개월을 보내게 될 부대에 도착했을 때, 부대는 임병장 사건으로 인해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부들이 많이 피곤했을 듯. 생각 외로 선임이 없는 동기생활관을 사용하는 등 험난 할듯한 군생활은 구타나 가혹행위 없이 순항했고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루에 인사를 천 번 한 거 빼고는.
(임병장 사건을 비롯한 여러 군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서 pass)
첫 보직은 수리부속 계원이었다. 부러움의 대상 행정병이 되었다. 수리부속 계원은 특수한 보직인데 군대에서 사용하는 총기나 장갑차 등등의 부품에 대한 일련번호와 품명을 확인하고 상급부대로의 청구나 정비실적을 기록하는 게 주 업무였고 업무는 단순해서 2~3달 정도 지났을까, 여유시간이 생기면서 자기 계발 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부터 부사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한 번 하는 군생활 부사관으로 해볼까?
우연히 국방일보(군대에서 나눠주는 신문이다)를 보다가 마주한 특전사 홍보란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안되면 되게 하라' 구호만 봐도 짐작하듯 힘들겠다고 덜컥 겁도 났다. 하지만 한계를 넘을 때 나는 성장해 있지 않을까?라는 긍정회로를 돌리며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군에 대한 마음가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필자는 처음엔 밀린 방학숙제 같았고, 한 번 하는 군생활 열심히 해보고 싶어졌다. 또 사회에 나갈 준비가 안 됐다고도 생각했다.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고 부사관을 하면 4년 동안 5천만 원을 모을 수 있겠다고, 그리고 운동하지 않았던 나도 운동을 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여자친구도 없던 나의 결정은 일사천리였고 부모님도 나를 응원해 주셨다. 특전사 모집공고문을 확인하며 체력평가 내용을 확인하고 턱걸이와 오래 달리기를 연습할 때도 나는 몰랐다, 특전사는 특수부대라서 낙하산도 타고 스쿠버도 하고 그런 부대인 줄은. 사실 지원할 때만 해도 특전사에 대한 정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유튜브나 미디어에 노출도 없었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해 보면 결정하고서는 무식하게 준비했다. 학창시절에도 운동을 즐겨하지 않던 나는 체력검정이 부담스러웠지만, 입대하고 나서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턱걸이와 달리기만 집중적으로 하면 되었는데, 혼자 준비하다 보니 잘 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되었다. 체력을 위한 전략은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였고 턱걸이를 2개 하던것을 12개까지 늘리기 위해 매일매일 봉에 매달렸다. 일과 이후 쉬는시간엔 항상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메르스로 인해 체력시험이 연기되어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체력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장소를 확인했는데 장소가 우리 집 옆동네에 있었다. 입대하기 전엔 몰랐는데, 집에서 버스 타고 15~20분 거리에 특전사 부대가 있었고 너무 좋았다.
어쩌면 특전사는 운명인가?
집 근처부대로 갈 생각에 필자는 '병사와 달리 출퇴근이 있는 간부! 집도 가깝고 친구들도 원하면 만날 수 있겠다!' 라며 생각했다. 하지만 특전사에는 많은 여단이 있었고 부대배정은 난수를 입력하여 랜덤 하게 정해지는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을 임관식 일주일 전 난수입력할 때 알게 되었고결코 쉽지 않은 부사관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