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잔해 위를 걸으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어두운 밤 비가 내리는 창밖을 와이퍼 소리가 길게 가로지릅니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주인공 애니의 얼굴이 잠시 비치고,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리지만 자신의 본명인 ‘아노라’를 끝끝내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참고로 ‘아노라’라는 이름은 ‘석류’ ‘빛’ ‘밝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애니는 그 이름을 고요한 침묵 속에 감춥니다. 이 조용한 망설임은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죠. 감독 션 베이커는 이 여정 끝에서 과연 애니에게 ‘빛’을 건네려 했던 걸까요? 아니면 그녀를 다시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남겨두려 했던 걸까요?
이 영화는 시작부터 현장의 생동감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션 베이커는 편집 없이 10분 가까운 롱테이크로 스트립댄스 클럽의 밤을 담아냅니다.
감독이 "성노동의 특정한 메커니즘, 고되고 힘든 노동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 것처럼, 카메라는 춤추는 모습과 일상의 리듬을 솔직하게 따라갑니다.
무대 위 네온빛과 관객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펼쳐지지만, 베이커의 시선은 자극적인 선정성보다 노동자들의 몸의 고단함, 동료들과 나누는 연대의 감정을 더 가까이 들여다봅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애니와 함께 밤을 보내길 바랐다"고 밝히기도 했죠.
이렇듯 영화의 미장센은 화려한 판타지가 아니라, 붉은 조명 아래 ‘현장’ 그 자체로서의 스트립댄스 공간을 강조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러시아 재벌 2세 반야의 호화로운 맨션이나, 도로 위의 추격 장면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맨해튼 뒷골목의 좁은 클럽에서 2세의 넓은 집, 다시 브루클린 철길가의 허름한 집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계급의 선명한 대비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리처드 브로디가 지적했듯, 베이커의 카메라는 인물에 지나치게 다가서기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의 움직임과 사건의 흐름을 잔잔히 담아냅니다.
그는 “베이커는 인물만을 찍는다. 충분히 가까이서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그저 움직임(그리고 자신의 고됨)을 보여준다”고 평했습니다. 즉, 카메라는 인물을 종종 객관적인 시선에 남겨두고, 관객이 전체를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만들죠.
때로는 영상미보다는 이야기의 맥락에 더 집중하는 태도로 보이지만, 동시에 인물을 하나의 ‘기계’나 ‘상징’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바라보려는 연출이기도 합니다.
애니와 반야의 만남은 처음엔 신데렐라식 로맨스의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아노라>의 초반, 우리는 게리 마샬 감독의 『귀여운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신데렐라 서사의 단면을 봅니다.
하지만 이 익숙한 환상은 곧장 장르적 전복을 만나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 익숙함을 뒤집는 순간들 속에서 영화가 품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감독의 비판적 메시지가 훨씬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실제로 반야는 애니를 자신의 눈부신 세계로 이끄는 듯 보이지만, 둘의 계약 결혼과 도주 과정은 로맨틱한 환상보다는 오히려 익살스러운 코미디와 범죄 스릴러가 어우러진 액션처럼 펼쳐집니다. 영화는 곳곳에 웃음이 흐르다가도, 그 이면에는 뉴욕의 차가운 공기가 스며 있습니다.
야광 파티와 광란의 결혼식, 온갖 소란이 폭죽처럼 터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영화는 차분하고 진지하게 전환되어 관객을 감정의 롤러코스터로 데려갑니다.
베이커는 언제든 반전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구원받을 것 같은 절정에선, 모든 영화적 상상력을 걷어내고, 애니를 원래 있던 음지로 조용히 돌려보냅니다. 결국 애니는 영화의 마지막에 철길 옆 허름한 집 앞에 홀로 서게 되죠.
환상이 완전히 깨어진 뒤, 감독은 "누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느냐"라는 오래된 질문이 아니라, "돌에 맞으면 누구든 아프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진실만을 남깁니다.
즉, 베이커는 신파나 훈계로 끝내지 않고, 오직 ‘피해와 고통’이라는 근원적인 사실만을 관객에게 남겨줍니다. 이 결말은 달콤한 희망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사회 구조와 현실의 단면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베이커의 주인공 애니는 23세 러시아계 미국인. 그녀는 스스로 몸을 파는 삶을 ‘직업’으로 받아들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그녀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신데렐라가 아닙니다.
맨해튼 클럽 뒤편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동료들과 수다를 떨며, 매일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죠. 베이커는 성노동자에게 분명한 주체성을 부여합니다. 이는 전통적 남성의 시선이 아니라, 애니라는 한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연출입니다.
예를 들어 클럽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관객이 애니의 춤에 도취되길 유혹하지 않고, 그녀의 몸짓과 표정을 똑같이 포착합니다. 감독은 이 인물의 "다층적 특권(젊고, 백인이고, 영어를 쓰는)"을 인정하면서도, 그들만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대표적으로, 스트립댄서의 기술과 노동 강도를 에로틱하게 포장하지 않고, 현실 그대로 그려내어 관객이 그녀의 고단한 입장에 더욱 공감하도록 만듭니다.
반면, 반야처럼 젊은 재벌 2세는 허영과 무력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는 농담처럼 마약 딜러라고 속였다가, 러시아라는 유전자의 무거움을 고백하죠. 강렬한 부를 가졌지만, 성장의 경로가 뒤틀린 채 어른이 된 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불균형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계급 모순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 노동자와 올리가르히,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두 세계의 어긋난 만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둘의 사랑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단절의 상징에 가깝죠.
이런 인물의 배치는 동시대 성노동자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베이커의 이전 영화들에서도 포르노 배우, 트랜스젠더 성노동자가 등장했듯, 『아노라』는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키 매디슨(애니 역)이 오스카를 거머쥔 이후, 영화는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아쉬움 섞인 비판도 함께 들려옵니다. 실제 성노동자 단체에서는 “영화가 성노동의 아주 일부분만 보여줄 뿐, 현실의 가난과 약물 중독에 시달리는 이들은 화면에서 배제됐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판은 영화가 선택적으로 조명받는 계층만을 비춘 건 아닌가,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베이커는 자신의 인물들에게 동정도, 조롱도 아닌 동등한 시선을 보냅니다.
실제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비하하는 멸칭 대신, 연대의 언어로 부릅니다. 덕분에 우리는 성노동자를 낙인이나 대상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