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오늘 스카 간다.”
시험이 한 달 하고도 10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시험공부를 한다고 열심히 도서관을 가고 스카(스터디 카페)를 간다.
“응, 수행할 게 많아. 집에서 하면 공부가 안 돼. 스카 갈게.”
아이고 중2가 되더니 드디어 우리 딸이 공부할 마음을 먹었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덜 할 수 있을까를 늘 연구하는 아이였다.
“엄마, 난 커서 돈 많이 벌고 싶어.”
어떻게 돈 벌거냐는 질문에 '공부 열심히 해서'라는 대답을 은근 기대했건만 로또 당첨 돼서 부자가 되겠단다.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더니 일확천금을 꿈꾸는 딸이 되었구나.
초6 어느 날, 자기는 공부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고 대학을 안 가겠단다. 공부를 해봐야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 알지. 그래도 '그래, 그래라' 쿨하게 대답했다. 며칠 뒤 갑자기 대학은 가야겠단다. 왜 마음이 바꼈냐고 물었다.
"놀이터에서 만난 중학생 언니가 그러는데 대학 못 가면 인간 취급도 못 받는대."
놀이터에서 세상을 참 거칠게 배우는구나 싶었다.
또 한 번은 “엄마, 나 서울대 갈래!” 그런다.
그래 설령 서울대는 못 가더라도 큰 꿈을 가지는 게 중요하지. 그러나 동상이몽.
“서울대 학식이 그렇게 맛있대.”
이런 자유로운 영혼의 둘째 딸이 얼마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새벽 6시에 스스로 일어나 아파트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1시간 동안 열심히 꽃단장을 하고 학교를 가는 것이다. 마지못해 학원을 가던 애가 학원이 끝나고도 친구들과 스카에 가서 공부를 하고 주말에도 공부를 하러 간다.
거 봐. 쟤가 어릴 때부터 한 번 마음먹으면 꼭 해냈다니까. 고슴도치 엄마는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대학생 큰 딸도 나갔다. 주말이라고 집에 있을 리가 없지. 1시간 넘게 머리를 만지고 이 옷 저 옷 다 꺼내 입어보던 중학생도 드디어 나간다. 안방과 제 방을 왔다갔다하며 부산을 떨던 아이들이 다 나가버리자 거실은 일순간 고요해졌다.
뜻밖의 수혜자는 남편이다. 요즘 부쩍 외로움을 타는 갱년기 남편은 드디어 이 집 사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영화관을 찾았다. 팝콘과 커피를 사 들고 최신 리클라이너관으로. 캬~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성비 최고의 데이트는 역시 영화관람이지.
오랜만에 단 둘의 데이트,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돌아온 배우 황정민의 <베테랑>에 관해 누구도 묻지 않은 영화평으로 침을 튀기며 귀가하는 중이었다. 정해인 같이 예쁘장하게 잘 생긴 배우가 악역으로 나오면 애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며 별 걱정을 다하는 나와 그것도 그렇겠다며 맞장구를 쳐주는 착한 남편. 우리의 영화관 데이트는 꽤나 성공적이었다며 흡족해한 것도 잠시,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많은 인파 중에 본능적인 알아차림. 차창 밖으로 언뜻 익숙한 모습이 지나갔다. 회색 버뮤다 바지에 검정후드 집업. 달리는 차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모습이지만 분명 내 사랑하는 둘째 딸, 스카에 있어야 할 내 딸이 맞는 것 같다.
“어, 쟤… 쟤… 유나 아니야?
옆에 저 남자애는 누구야? 차 세워 봐.”
갑자기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느낌.
말리는 남편을 뒤로하고 다급히 차에서 내려 딸을 쫓아갔다. 2차선 도로 건널목, 초록불 신호에 딸과 남자애가 섰다. 나도 멈칫 섰다.
‘가서 확 아는 척 해 버려?
아니지. 스카에 가는 중인지도 모르잖아?’
배신감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채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엄마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인파들 속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20미터 앞에 있는 롯데리아로 들어가나 싶더니 왼쪽 골목으로 휙 사라진다. 놓칠까 봐 얼른 뛰어갔다. 다행히 한 쌍의 바퀴벌레는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휴~ 갑자기 현타가 온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둘은 골목 저 끝 가게 앞에 서더니 그 안으로 들어간다. 알록달록 기계들이 잔뜩 있는 인형 뽑기 가게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왠지 민망해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한 시간 후에 딸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저것이. 눈치채지 않게 흘겨봤다.
“아빠랑 영화 보고 오다가 너 봤다. 남자애랑 가더라.”
파충류의 뇌가 작동하여 목소리가 높아지려 했지만 심장 호흡을 깊게 하고 나대는 목소리를 낮춘다. 그래도 애 하나 키워봤고, 사춘기 대하는 법에 대한 책도 꽤 읽어본 엄마 아닌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때 얼른 다 물어봐야 돼.
너네 반이니? 아니. 5반 애야. 이름이 뭔데? 그것까지 말해야 돼?
너 스카 간다고 거짓말했는데 엄마가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집은? 형제는? 언제부터 사귄 거야? 나도 모르게 호구 조사를 하고 있었고 딸은 순순히 불고 있었다. 썸 타다가 크리스마스를 100일 기념일로 하려고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다나 어쨌다나. 참 별 걸 다 계산하는 요즘 아이들이네. 오래 묵은 엄마가 잘 이해하지 못 하자 아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앗, 전전두엽 공사 중인 사춘기 아이를 너무 몰아세우면 안 되지. 살짝 꼬리를 내린다.
“언니 중학교 때 남자 친구 사귈 때는 아빠가 영화표도 끊어주고 그랬어. 그러니까 이야기하고 만나. 또 거짓말하면 너 못 나갈 줄 알아.” 최대한의 부드러움을 장착한 협박에 아이도 멋쩍게 웃는다.
이 정도면 잘 끝낸 건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오늘의 위태위태한 사태는 이렇게 적절한 선에서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가끔 남자 친구를 만난다고 나갔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친구랑 공부하겠다며 여전히 도서관을 가고 스카를 갔다. 가끔 누구랑 가냐고 묻기도 했지만 흔쾌히 믿어줬다.
“친구랑 가면 공부가 되겠어? 놀다 오는 거지.”
대학생 큰딸이 답답한 듯 엄마에게 한 마디 한다.
그래 나도 안다. 그래도 믿는 거야.
너도 그러고는 잘 컸잖아?
며칠 전 둘째 딸에게 물었다. 오늘은 남친 안 만나니?
헤어졌어! 쿨하게 대답한다.
잉? 어렵게 맞춘 기념일은 어쩌고?
*사진 출처 모두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