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강습이 끝나고 점심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멀티센터 2층으로 내려간다.
반짝반짝 찰랑거리는 수술치마, 갈색 가죽 바지에 금색 구두,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에 롱부츠. 화려한 의상들 사이에 검정상하의,검정댄스화로소박하게 깔마춤하고 댄스실로 들어간다. 츄리닝 바지 입고 오는 여인들도 있는데 나는 그래도 슬림하게 딱 붙는 의상이니 그런대로 춤복에 넣어주자. 나도 언젠가는 저 수술 달린 화려한 치마를 입어보리라.
Donde Voy, Donde Voy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Esperanza es mi destinacio'n
(희망을 찾아 헤매고 있어)
Solo estoy, Solo estoy
(홀로 외로이, 홀로 외로이)
티시 이노호사의 돈데 보이(Donde Voy) 음악이 흘러나온다. 익숙한 컨트리풍 올드 팝송. '돈데 보이'가 무슨 남자아이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고백하면 내 무식이 너무 티가 날려나? 일자리를 찾아 죽음의 국경을 넘나드는 불법이민자 멕시코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라고 한다.
애달픈 곡조에 맞춰 두 손과 두 발을 앞으로 모았다 뒤로 빠졌다 '쿵작작 쿵작작' 왈츠를 춘다. 수줍은 소녀가 된 듯, 우아한 발레리나가 된 듯 , 먼 이국의 가련한 여인이 된 듯 발꿈치를 한껏 치켜들고 최대한 몸을 위로 길게 늘어뜨린다. 돌고 돌고 댄스의 바다에 빠진다.
어~ 오늘 춤 좀 되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춤 배우기'가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십오여 년 전필리핀 세부에서 2년 살 때다. 유치원 학부모라는 인연으로 외국인 친구들과 댄스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친구처럼 지내던 동갑내기 중국계 유치원 원장이 춤을 배우고 싶다는 나를 위해 엄마 댄스교실을 연 것이다. 필리피노들은 춤이 일상이다. 유럽, 스페인 등에서 온 친구들도 춤은 그저자연스러운 몸의 표현이다. 모두들 부드럽게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는데 나만 통나무처럼뻐덩거리고 있었다.
몸치임이 분명했다.돌이켜보면 친구들은 수업이 필요 없었는데 나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나 싶다. 댄스교실은 얼마가지 않아 흐지부지해졌다.
몇달 뒤 소피 마르소를 닮은 러시아 친구 아냐
(그녀도 같은 유치원학부모)가 춤 배우기 very good인 장소를 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 도전해 보지 뭐. 흔쾌히 따라나섰다. 택시를 타고 세부의 번화가로 갔다.
그녀를 따라4층 건물 지하로 내려갔고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맡기고 안으로 인도되었다. 근데 여기는? 남녀가 뒤섞여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륜의 온상지카바레, 말로만 듣던 카바레 아냐?리드하는 남자는 춤선생인가? 불안이 엄습해 왔다. 아냐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k-유교 아줌마는 그녀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춤을 즐기고 있는 아냐는 너무나 평온하고 즐거운 모습이었기에 차마 나가자고 할 수 없었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마냥 서있다가 처음 본 남자 품에 아니, 처음 본 외국인 남자손에 이끌려 춤을 추며 불안과당황스러움
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렸던 웃지 못할 기억이 있다.
반듯하게 자란 한국 아줌마는 모르는 남정네와 카바레(같은 곳)에서 춤추는 것에 대한 선입견을 결코 버리지 못했고,그 외국 춤문화에도 끝내적응하지 못했다. 춤을 배우겠다는 의지는그때 모두 접어 버렸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 못하니 안 하게 되고 몸은 점점 뻣뻣해졌다. 30대부터 목디스크가 왔고 공주병 비스무리한 불치병을 달고 살았다. 조금만 집안일했다 싶으면 드러누웠다. 그래도 어디 애 엄마가 안 움직일 수 있나? 남편이 도와준다 해도 여자들이 해야 될 일은 산더미이다. 특히 애들 챙기는 일이라면 아파도 하는 게 엄마니 어느덧 만성이 되어 통증에도 무뎌졌다. 만성으로 20년을 지내다 쌓이고 싸여 5년 전 터졌다.
목디스크에 허리디스크, 급성 어깨석회건염까지.
앓아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알리라. 이러다 내 인생 침대에서 끝내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안 되겠다 싶어 열심히 치료받고 열심히 걸었다. 조금씩 호전되던 차에 가까이 멀티센터가 생겼다.생존운동으로 수영 강습을 신청하다가라인댄스에 '댄스'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도전해 봐?
댄스 중에 관절에 무리가 제일 없어 보였다. 살랑살랑 흔들면 되는 춤으로 보였고 나이 있으신 분들도 꽤 많이 하는 거라 쉽게 봤다. 근데 이게만만치 않다.지르박, 탱고, 차차차, 삼바, 왈츠 같은 다양한 댄스 스텝을 익혀야 한다. 특히 동서남북으로 돌아야 하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혼자 다른 방향을 보며 내 춤에 취해 있을 수 있다.
부푼 마음으로 등록했으나내 몸인데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는 마구 꼬였다.겨우 스텝을 익혀도음악이 나오거나 누군가 쳐다보고 있으면 홀라당 다 까먹었다. 도는 건 얼마나 많은 지우왕좌왕.엉망진창 스텝을 밟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웃음으로 민망함을 무마했다.
아 ~창피하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움에 그만뒀을 법한데 나이가 자존심을이기나 보다. 처음부터 잘하는사람이 어딨냐? 저기 저 앞 줄현란한 춤사위를 뽐내고 있는 선수들도 처음엔 다나같았겠지.스스로 위로하며뻔뻔해졌다.유튜브영상이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가족들이 없을 때 몰래 영상을 틀고 연습을 했다. 3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따라
하게 되었다. 강사도 "이제 잘하네." 한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신나던지.
역시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9개월이 지나간다.반짝이 댄스옷을 샀다.나의 춤도 제법 늘었다. 웨이브를 탈 땐 아직 고장 난 로봇 같지만 그래도 음악이 나오면 몸이 절로 스텝을 기억해 움직인다. 신기하다.
주말 오후, 조회수 5억 뷰를 달성했다는 블랙핑크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듀엣곡<아파트> 음악이 유튜브에서 흘러나온다. '나 한 번 봐봐' 하며 라인댄스에서 배운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를 신나게 춰 보였다. 남편과 두 딸이 토끼눈을 뜬다. 내 춤실력에 놀란 건가?
나는 곧 현실을 받아들였다.
"에잇, 연습 더 해서 다시 출게."
탱고를 배운 날, 앞 줄 선수에게
"어쩜 그렇게 절도 있고섹시하게 출 수 있어?"
감탄했더니 내 옆 친구가 대신 대답한다.
"우린 안 돼. 그런 태생이 아니야."
"내 태생이 어때서? 나도 할 수 있거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는 그런 태생이 아닌 건 맞는 건 같다.
그러면 어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시간이 즐거우면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