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은 식탁 앞에 털썩 앉았다.
왼쪽 다리는 의자 위에 양반 다리로 뉘어 앉아야 편하다.
밥, 콩나물국, 컬리에서 산 떡갈비와 그 옆에 대충 부쳐낸 계란후란이, 그리고 먹다 남은 양배추샐러드.
이렇게 저녁 한 상을 차리고 자리 앉아서 먹으려고 하니 갑자기 힘이 빠지며 한숨이 나온다.
죽고 싶다. 아니 그냥 사라지고 싶다.
참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어쩔 땐 너무 기뻐서 그 기분이 영원할 것 같다가도 이럴 때면 내가 언제 기뻤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한 없이 우울해진다.
정말 깃털처럼 가볍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감정이다.
기태가 오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한다.
그와 또 같은 상에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일부러 피하기 위해 눈치 보며 먹으면 밥이 맛도 없거니와 체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틀 전 기태는 미연의 한마디에 울 것 같은 울상이 되더니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기태는 기분이 나쁘면 입을 닫아 버린다.
그러곤 며칠이나 입을 열지 않는다.
십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습관이다.
그가 입을 닫아버리면 미연의 머릿속은 난장판이 된다.
혼자 속으로 울다가 웃다가 화가 났다가 용서했다가 다시 분노했다가 화가 났다가 한 번도 기뻤던 적이 없던 기분으로 이어진다.
한 마디로 수 십 번의 감정이 쓸려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그동안 기태는 고요하다.
고요하지만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를 폭풍 전야이기도 하다.
가끔 미연은 기태와 이런 냉전을 하고 있을 때면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부모님이 싸우고 난 다음날,
미연은 아버지가 제발 제발 늦게 들어오길 빌었다.
아버지가 들어온 집안의 공기는 한 없이 무겁고 차갑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했다.
기태는 미연의 아버지가 아닌데
미연은 왜 이렇게 기태에게 아버지의 가면을 씌우는지 모르겠다.
기태의 묵직한 발소리, 새된 기침소리, 그리고 밥 옆에 두고 마시는 소주, 그러다가 소파에 앉아서 트는 티브이소리.
미연 아버지의 저녁 루틴과 너무도 닮아있다.
다른 집의 모든 아버지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그러다가 갑자기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버럭 지르는 거다.
아버지가 화난 이유를 찾자면 뭐 한도 끝도 없을 거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억울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진 적 없는 울분과 원망.
미연 또한 아버지로 인해 지워지지 않는 울분과 원망이 맺혀있다.
불행은 되풀이된다더니 딱 그 짝이다.
기태가 이럴 때면 그 울분과 원망이 올라온다.
그는 아버지처럼 뜬금없이 소리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지 않는다.
기태는 그렇게 묵언 수행을 하다가 어느 날 화해의 손길을 내밀거나 또는 서로가 필요에 의한 말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감정이 풀려버리기 일쑤다.
작심하고 상처 입히기 위해서 날 선 말은 하는 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나면 파스텔로 그림을 그린 뒤, 손으로 테두리를 쓱쓱 뭉게 버리면 흐릿한 배경이 되는 것처럼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 분노에 찼던 감정은 누그러지고 원망스러운 감정은 가라앉는다.
기태가 말한다.
"아흐흠..... 산책 나갈래? "
"...... 산책?...... 더운데......"
"그럼 말던가."
"누가 안 나간대."
미연은 마지못해 나가는 듯 뒤따라 나서지만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의 롤러코스터는 무사히 원점 회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