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늦었지만 역전 한번 해볼게요.
놀이터에서 한창을 놀다 집에 돌아오는 아이는 매번 파란 대문 앞에서 서성인다. 친구들이 모두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쪽문으로 돌아 들어갔다.
큰 길가에 있는 파란 대문 2층집.
우리 집이긴 한데 저 파란 대문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아니다. 파란 대문 왼쪽으로 돌면 보이는 담장 옆 낮은 철제쪽문. 여기가 진짜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쪽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 집 안에는 화장실이 없다. 담장 반대편 좁은 길 끝에 도착해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양변기가 놓인 화장실. 밤에 화장실에 가려면 현관 앞에 놓인 손전등을 꼭 들고나가야 했다. 또 다리를 구부리고 키를 낮추어 걷는 게 공식이다. 벽 너머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네 번의 이사 끝에 화장실이 집 안에 들어왔다. 무려 좌변기에 욕조까지 설치된 이곳은 진짜 우리 집이다.
방 2칸에 작은 거실 겸 주방이 전부였지만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세명의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다섯 식구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너네 집 오래된 여관방 같아.”
고학년이 되니 이사로 전학 가는 친구들이 많아진다. 신도시 개발사업이 진행됐고 바로 옆 동네에도 우후죽순 아파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동네와 학교의 아이들이 뒤섞이며 구도시와 신도시의 문화가 혼재했다. 친구들의 집은 왜 죄다 넓고 좋은 건지, 우리 집은 그때 그대로인데. 덕분에 자존감은 떨어졌고 눈치는 빨라졌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은 출발점이 다르면 너무나 뻔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몸소 느끼면서 말이다.
"아줌마가 볶음밥밖에 못해줘서 미안해. 다음에 오면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아니에요. 저 볶음밥 좋아해요. 그리고 너무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똑같은 삼 남매에 다섯 식구. 하지만 친구네 집은 크기와 모습 그리고 분위기까지 우리 집과 너무 달랐다.
각 방마다 있는 침대와 책상, 넓은 거실에는 티비와 소파, 주방에 있는 정갈한 식탁은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평범한 볶음밥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당근, 호박, 양파, 계란, 소시지가 들어있던 볶음밥은 내 목표가 되었다.
'나 커서 꼭 이렇게 살 거야. 32평 아파트. 이제 이게 내 꿈이야.'
인생은 출발점이 다른 달리기와 비슷하다.
그 달리기가 100m 단거리 종목이었다면 승패는 뻔했겠지만 우리 인생은 42.195km 마라톤이다.
결과는 끝까지 가봐야 볼 수 있고 끝까지 해봐야 알 수 있다.
"아빠는 왜 대출을 안 받고 살았어? "
"은행만 좋은 일을 내가 왜 해. 뭐 하러 대출을 받아. 이자 내는 게 제일 아까운 거야. 그리고 남한테 빚지고 사는 거 아니야. 아끼고 저축하면서 모으고 그래야지."
결혼 후 아빠 덕분에 경제에 눈을 떴다. 대출도 받고 이사도 자주 가며 아빠와는 반대로 해봤다.
32평 아파트 꿈 하나는 이루었다. 이제 남은 목표를 위해서, 그리고 떨어진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서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아직 42.195km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다.
엄마 아빠,사실은 말야.
"노스페이스에서 패딩 한번 사고 싶었어."
"대형입시학원 방학특강 한번쯤은 들어보고 싶었어."
"우리 식구 다 같이 여행한 번 가고 싶었어."
"우리 집에 친구 초대해 보고 싶었어."